[멜론소다, 혹은 생강라떼] 멜론소다, 혹은 생강라떼

by 수빈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계속 앞으로 걷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맨발이었다. 서늘한 흙바닥의 감촉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조금 지쳐 보이기도, 어딘가에서 잠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모른채 그저 걸었다. 저 멀리 작은 굼어 하나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아마 그 빛을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빛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 문득 발 밑을 내려다보니, 어느 새 진흙으로 바뀌어 있었다. 발끝부터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빠져들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진흙은 더 깊게 몸을 삼켰다.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진흙은 서서히 몸을 삼켰고, 결국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헉-하고 밭은 숨을 뱉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5시 반. 창밖은 어슴푸레 밝아지고 있었다. 다시 시작된 하루. 마른 세수를 하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초췌한 얼굴은, 누가 봐도 잠을 설친 게 분명했다. 그래도 쉴 수는 없다. 이럴 땐 차라리 직장인이 낫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하루쯤은 쉴 수 있으니까.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온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꾸역꾸역 준비를 마치고 신발장 앞에 섰다. 거울 속 여자는 무표정했다. 아니, 어쩌면 조금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입꼬리에 힘을 줘 웃어보았지만,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 너 혼자야.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어. 약해지면 안 돼.”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매듭을 단단히 조이며, 마음도 함께 동여맸다. 집을 나서자 아침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카페 앞에 도착하니 유리문 너머 가게 안이 보였다. 오늘부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곳.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사용할 기계들의 전원을 하나씩 켠 뒤, 가장 좋아하는 오디오 전원을 켰다. 차근차근 가게를 둘러보며 아침 루틴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음악, 익숙한 향기,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이 공간. 오픈 준비를 위해 커피머신을 정리하고 있던 중,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오픈하는 날이지? 내가 마수하러 왔지!”


‘어디 보자, 레몬에이드 세 잔 부탁해요!’ 순이이모는 동네 이웃 두 사람과 함께였다. 이모의 쾌활한 목소리가 음악과 어우러져 가게 안 분위기를 밝게 바꿔놓았다.


“잠시만요. 바로 만들어 드릴게요.”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 컵에 담았다. 레몬청 두 스푼, 플레인 탄산수까지. 기다란 수저로 잘 섞이게 젓는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닫아 손에 쥐여드렸다.


“여기 있습니다.”


순이이모는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며 말했다.


“돈 많이 벌어서 꼭 부자 되라!”


그리고 옆의 두 사람을 가리켰다.


“여기는 건너편 봄날의 정원 사장님, 꽃처럼 고운 우리 윤화씨. 그리고 여긴 골목 돌아서 있는 만능철물 김사장님. 뭐든 고장 나면 여기부터 찾으면 돼.”

“장사하다 보면 여기저기 손볼 데가 생기기 마련이야. 가까이 있으니까 언제든 오라고!”

“안 그래도 우리 동네에 분위기 좋은 카페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드디어 생겼네! 아가씨, 자주 올게?”


오가며 자주 볼 사이니 앞으로 잘 지내자며, 이 동네는 아직 정이 남아 있는 곳이라 다들 서로 잘 챙기고 가까이 지낸다고, 따뜻한 말들이 이어졌다. 순이이모가 좋은 사람이라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모인 것인지, 아니면 이 동네 사람들이 유독 따뜻한 건지. 불편하고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말이 길어지면 감정이 북받칠 것 같아 짧게 인사했다. 오픈 첫날이라 바쁠 테니 얼른 자리 비워주자며, 순이이모가 두 분을 데리고 나갔다. 창밖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순이이모. 그 모습까지 따뜻하게 가슴에 남았다.











“행운이 가득한 딸기라떼요!”

“저는 복숭아 아이스티 주세요!”


하교 시간이 되자 카페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낯익은 아이들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 뒤섞여 인산인해. 어제 받아간 쿠폰을 쓰겠다며, 혹은 친구한테 얘기 들었는데 어제 시음한 딸기라떼가 너무 맛있었다며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이 귀엽고 고마운 마음과는 달리, 정신없이 바쁜 몸은 SOS를 칠 지경이었다.


“어제 뽑기 또 안 해요? 저 SNS에 올렸는데 사람들 반응 진짜 좋았어요!”

“맞아요! 거기 어디냐고, 재밌어 보인다고 가고 싶다고 댓글 엄청 달렸어요.”


누군가는 테이크아웃 후 곧장 차에 올라타 사라지고, 누군가는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수학 선생님 흉을 보며 깔깔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잠시 짬을 내 숙제를 한다며 바 테이블에 앉아 문제집을 펼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텅 비었던 공간이 금새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나는 중학교 때 뭘 했더라. 학업에 큰 흥미가 없었던 나는 대부분 학원에 가는 친구들과 달리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집, 유일하게 나를 기다려 준 건 컴퓨터. 그리고 그 속의 인터넷 세상. 그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름 모를 사람들과 나눴다. 즐거운 일, 속상한 일,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던 마음까지. 그래서였을까. 친구가 없어도 외롭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학원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이들은 하나둘 떠났고, 가게는 조용해졌다. 한숨 돌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녹음을 보니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만 같았다. 매일 지나다녔던 길인데도 오늘따라 유난히 예쁘게 보였다. 그렇게 풍경에 넋을 놓고 있던 그때, 낯익은 시야에 들어왔다. 지우였다.


“지우야, 안녕!”


지우는 여전히 감정을 읽히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게 앞에 잠깐 멈춰서서 가게 안을 눈으로 훑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더니 이내 조용히 나를 지나쳤다.


“지우야? 지우야, 멜론소다 먹고 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아니면 들었지만 외면하는 걸까. 지우는 아무 대답도 없이, 끝까지 뒷모습만 남긴 채 멀어져갔다. 나는 지우의 뒷모습이 사라질때까지 한참을 바라봤다. 고작 이틀 전, 그것도 잠깐 마주한 사이일 뿐인데 생각보다 서운한 마음이 크게 밀려왔다. 어쩌면 오늘 ‘수고했어요’ 한마디가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아이들도 모두 각자의 집으로 향하고, 카페 안에는 나 혼자 남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이 공간이, 갑자기 낯설 만큼 조용해졌다. 스팀컵에 우유를 담는다. 취이이익. 스팀기로 뜨거워진 우유를 애정하는 머그컵에 붓는다. 냉장고에서 꺼낸 생강청 한 스푼을 넣고 휘휘 젓는다. 마음이 허전할 때 생각나는 생강라떼. 입술을 대고 후후, 바람을 불며 천천히 마시려던 그때,


“컥.”

덩어리 큰 생강이 목을 막았다. 꿀꺽 삼키고 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쩌면 생강 때문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팀장님, 어쩐 일이세요?”


어둑어둑 해진 저녁, 이제 슬슬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감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종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너머로 보이는 반가운 얼굴.


“이건 금전수. 돈 많이 벌어서 나 맛있는 거 사주라.”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그의 얼굴.


“메세지로만 들었을 땐 안 믿겨지더라. 이지안이 카페 사장이라니.”


간간히 연락만 주고 받다 1년 만에 실제로 마주한 그의 모습은, 체념과 피곤함으로 가득했던 예전과 달리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잘 지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훨씬 행복해진 듯해 보기 좋았다. 회사 다닐 때 늘 완벽했던 쓰리피스 정장 대신 캐주얼하지만 깔끔한 복장이 어딘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한 손에 들고 있는 금전수를 건네받았다. 자그마한 화분 속에서 꼿꼿하게 서 있는 작은 나무. 특별한 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싱그러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손님들이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카운터의 눈에 띄는 자리에 화분을 놓았다. 바 자리로 그를 안내하며 자연스럽게 원두를 갈았다. 서로 주문을 받지 않아도 뭘 마실지 아는 사이. 갈린 원두를 필터 위에 올리고 물을 천천히 부었다.


“이야, 벌써 익숙해진 폼이 나는데?”

“제가 전문가처럼은 못 해도, 뭐든 흉내는 잘 냈었잖아요.”


내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가라앉아 보일 때마다 그는 옥상으로 나를 불러내 아이스 카페라떼를 건넸었다. 사내 카페의 아이스 카페라떼는 내 최애 음료였다. 특유의 고소한 풍미는 어떤 유명한 카페도 흉내내지 못 했었다. 그가 건넨 카페라떼를 마시며 바깥 공기를 잠깐이라도 쐬면 다시 기운을 낼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카페라떼보다 더 훌륭한 각성제이자 에너지 음료였다. 늘 내게 원동력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었다.


“요새 많이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꼭 안 와주셔도 되는데.”

“그래도 내가 아끼는 후배가 가게 오픈 했다는데 무조건 와야지! 사장한테는 영업 간다고 하고 왔지, 뭐.”

“팀장님은 여전히 농땡이 많이 피우시네요. 그러다가 잘려요.”

“나를 자른다고? 회사 생각하면 그렇게 못 하지.”


그의 흔들림 없는 자신감이 좋았다. 어떤 일을 하든 여유로워 보였고, 늘 현명한 해결책을 제시했따. 그런 그였기에 자연스럽게 믿고 따를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떠난다고 말한 날, 그때부터 어쩌면 내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메세지로는 다 전하지 못 했던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연초까지만 해도 회사가 정말 힘들었는데 좋은 투자자를 만나 예상보다 큰 금액을 투자받았다는 이야기, 최근 입사한 신입 갓 제대한 군인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있어 사소한 장난으로 놀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이야기. 잘 적응하고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직접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주니 더 없이 좋았다.


“보란 듯이 나와서 잘 되고 싶었지. 그런데 그거, 생각처럼 쉽진 않더라. 그래도 열심히 하니까 기회는 오더라?”


짧은 한 마디 속에 그동안의 고생이 묻어났다. 요행을 바라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의 태도를 옆에서 배우려고 노력했었다. 회사 생활 하면서 아무리 큰 어려움이 와도, 열심히 노력한 것들은 어떻게든 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물론 나는 그것을 끝내 이겨내지 못 하고 회사를 나왔지만.


커피를 다 마신 그는 빈잔을 건네며 자리에 일어나 가게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마치 가게가 아니라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는 듯한 기분이 들어 조금 긴장했다. 묘한 표정으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일도, 모레도 힘내자, 이지안.”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위한, 혹은 나를 위한 위로같았다.







마지막 인물까지 등장 완료입니다!

이제 모든 인물들이 모였으니 앞으로, 앞으로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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