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소다, 혹은 생강라떼] 행운의 뽑기

by 수빈

익숙하지 않은 숫자 6개를 누른다. 삐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순서대로 불을 켜고 창문을 여는 동작이 아직 낯설다. 텅 빈 공간엔 아직 아무런 가구도 놓여 있지 않지만 마음은 넉넉해지는 기분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도 이 공간만 오면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완연한 봄이다. 벌써 바깥 풍경이 짙은 푸른색으로 물든 모습을 보면 이른 여름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다. 팔을 걷어붙이고 바닥을 정리하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순이이모였다.


“아니,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정리가 안 되면 언제 오픈하려고!”


이모의 호들갑스러운 말이 공간을 채웠다. 이모의 등장만으로 공간이 따뜻해지는 거 같이 느껴졌다. 낯선 공간에서의 불안함이 익숙하고 편안함으로 바꼈다.


“그러게요. 처음이라 그런지 컵 하나도 고민되는 거 있죠?”


카페 오픈을 준비하면서 내부공사 점검이며 왔다갔다 하다보니 이모랑은 벌써 사이가 가까워졌다. 이모는 친한 이웃사촌이 생겨서 좋다며 웃었고, 나보다 가게에 더 애정을 쏟았다. 나도 가까이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마음이 놓였다.


“그래. 고민이 될 법도 하지. 그래서 언제 오픈이라고?”

“이제 필요한 건 다 샀어요. 이번 주 중으로 정리하면, 다음 주말쯤에는 열 수 있을 거 같아요.”


말을 뱉고 나니 실감이 났다. 내가 카페 사장이라니. 예전부터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기대도 되고, 그만큼 불안하기도 했다. 잘할 수 있을까?


“그래, 지안이 너는 어렸을 때부터 똑 부러졌잖아. 난 믿어.”


스멀스멀 올라오던 부정적인 생각이 이모의 한 마디로 싹 내려앉았다. 이모는 마술사 같다. 음식에도, 말과 행동에도 가득 담긴 따뜻함은 전달받은 사람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래, 잘 할 수 있어. 나를 믿어. 이모의 따뜻한 손을 꼭 잡았다.










개운하게 일어난 아침은 오랫만인 거 같다. 요즘은 억지로 알람 소리에 깨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다. 오전 8시.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늑장 부릴 여유는 없다. 얼른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매일 자동적으로 출근했던 방향과는 다른 반대 방향으로. 버스 번호, 창밖 풍경, 지나치는 정류장들. 모든 것이 낯설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날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이 낯설기만 한 모든 것들이,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다가온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지나 익숙한 정류장에 내린다. 바로 앞에 보이는 가게는 이제 내 가게다.


문 앞을 가로막은 각종 택배 상자들이 오늘 내게 주어진 숙제다. 겨우 발끝으로 상자를 밀고 문을 열었다. 텅 빈 공간이지만 오늘 이곳은 가득 채워질 예정이다. 상자들을 하나 둘 옮기고, 게 중 가장 큰 상자부터 열었다. 두군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여니 입간판이었다. 카페 지지. 나의 첫 공간에 붙여준 이름. 간판을 보니 이제 정말 카페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설렘만 가득했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잠시 후 가구와 집기가 가득 실은 트럭이 가게 앞에 도착했다. 인부들이 분주히 짐을 나르는 동안 나도 함께 바빠졌다. 가구와 집기의 위치를 일일이 안내하고, 자리에 놓은 가구들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광을 냈다. 분명 오전까진 텅 빈 공간에 생기가 돌았다. 소란해진 바깥을 바라보니 어느새 하교 시간. 아이들이 무리지어 학교를 나서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급 승용차에, 또 누군가는 ‘OO학원’이라고 적힌 봉고차에 올라탔다. 잠시 소란했던 학교 앞이 금세 고요해졌다. 큰일이다. 이렇게까지 걸어서 하교하는 아이들이 없다니. 나도 몇 달 못 버티고 문을 닫는 건 아닐까? 그 때였다.


“저기요.”


턱 선에 딱 맞춘 단정한 까만 단발머리, 깔끔한 교복, 크기 검은 눈동자.


“이번엔 뭐에요? 닭강정? 탕후루?”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기 가게가 엄청 자주 바꼈거든요.”

“아, 여기는 이제 카페야.”


내 대답에 아이는 금세 흥미를 잃은 듯 했다.


“아, 카페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가게 안을 휙 훑은 눈은 나를 위아래로 스치듯 바라봤다.


“오래 잘 버티시길 바라요.”


그러고는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툭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말이 던진 작은 돌 하나가,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진짜 큰일이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아 괴로운 며칠이 흘렀다. 더 늦출 수는 없으니, 일단 기본적인 홍보부터 시작하자 마음 먹고 전단지를 제작했다. 하단에는 방문 시 상요할 수 있는 무료 쿠폰을 붙였다. 이렇게 하면 전단지를 버리지 않겠지?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학교 앞으로 나갔다. 아이들의 손에 전단지를 건네며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생각치 못한 반응들이 돌아왔다.


“버블티 없어요? 난 버블티만 먹는데.”

"카페? 여기 배달되는 카페 많지 않아?"


다들 빠르게 걸음으로 전단지를 받아들고는 무심하게 지나쳤다. 쿨하게 거절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느 새 한산해진 학교 앞. 아이들은 지난번처럼 각자 자신의 차를 타고 조용히 사라졌다. 예상보다 더 큰 난관에 패닉이 오는 거 같았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쿠폰은 별로 효과 없을걸요. 요새 애들은 공짜로 주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재밌는 거면 모를까.”

"재미?"


내가 되묻자 아이는 조금 망설이다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여기 문방구 아저씨가 ‘가챠 이벤트’를 했었어요. 천 원 내고 뽑기 하면 랜덤으로 선물 주고. 그런 거 하면 애들 진짜 몰려올걸요.”


더 물어볼 새도 없이 휙 뒤돌아 사라지는 아이는 저 멀리 멀어지고 있었다.












가게는 손님 맞을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과연 손님이 올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자영업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작 몇 달 해 본 카페 아르바이트 경력만 믿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몸집을 키워나갔다. 오전까지만 해도 설렘으로 가득했던 이 공간이 이제는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온 몸을 짓누르는 듯 했다. 가족들에게 아직 이 사실을 말도 못 했는데, 혹시 말 꺼내기 전에 문을 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점점 꺼져가는 기분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동네는 여전히 조용했다. 어렸을 땐 삼삼오오 모여 놀던 아이들이 있어서 늦은 오후지만 복작복작 했는데, 요즘은 순이 이모의 말처럼 아이들이 다 학원으로 숨어버렸는지, 햇살이 내려 앉은 풍경과 달리 고요하기만 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릴 적 가장 자주 걸었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동네는 굽입굽이 이어진 작은 골목들이 많다. 나는 그런 골목을 걷는 걸 좋아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소리들이 있었다. TV 소리, 밥 짓는 소리, 가끔은 ‘얼른 와서 밥먹어!’ 하고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 어쩌면 고요한 집의 적막함이 싫어서 그 골목들을 헤매고 다녔던 걸지도 모르겠다. 새삼 내가 이 동네에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되었다.


연결된 골목으로 쭉 걷다보니 다시 학교 앞에 다다랐다. 물을 엎지른 건 나고, 그걸 수습해야 할 사람도 나다. 여기는 회사도 아니고, 도와줄 사람도 없다. 오롯이 내 몫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겁게만 느껴졌던 책임감이 지금은 묘하게 용기로 다가왔다. 그래. 할 수 있어, 이지안. 지금까지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다 해냈잖아. 집에 가서 밥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아 순이 이모 네 가게에 들러 포장해 가기로 했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됐는지 이모가 정리를 하고 있었다.ㄽ마


“바쁠 텐데 웬일이야? 가게 정리는 다 했어?”

“네. 가게는 정리 다 됐고 이제 저만 마음의 준비를 하면 될 거 같아요.”


떡볶이랑 순대를 포장해달라고 부탁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이모네 가게 창 밖으로 보이는 건 더 이상 ‘임대문의’ 현수막이 아니라 ‘카페 지지’라는 내 간판이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집에 가서 든든히 먹고 푹 쉬고. 잘 쉬는 것도 중요한 거 알지?”


이모의 말은 언제나 그렇듯 따뜻하다. 먹을 것도 그렇고, 말 한마디도.


“오늘 가게에 온 아이가 먹으라고 간식을 줬는데 너무 많더라고. 넣어뒀으니 같이 먹어."


이모는 언제나 이렇게 마음을 나눠준다. 내일 보자는 인사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봉투 안에는 떡볶이와 순대, 그리고 포춘쿠키가 들어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포춘쿠키가 반가워 봉지를 뜯고 과자를 반으로 갈랐다. 안에 든 얇은 종이 쪽지 하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을거야.’ 짧은 한 문장이 전하는 묵직한 힘.


그래, 이거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다음날 학교 앞. 어제보다 더 이른 시간에 나와 가판대를 꾸몄다. 노란색 포스터엔 큼지막한 손글씨로 ‘오늘의 운세 뽑기 이벤트!’라고 적혔다. 바람에 펄럭이는 포스터를 고정하고, 작은 뽑기통과 음료 샘플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운세 한 번 뽑아보세요! 오늘의 행운 음료 무료로 드려요!”


반응이 없었던 어제와 달리, 아이들이 하나둘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보세요. 나에게 두 배로 돌아올지도?”

“색깔은 뭐야?”

"행운의 색깔은 빨간색, 딸기라떼다!"


운세를 뽑은 아이에게 딸기라떼 샘플을 건넸다. 올해 딸기 처음 먹는다며, 너무 맛있다고 난리다. ‘나도 뽑을래!’, ‘나도!’ 옆에 있던 친구들도 뽑아보겠다며 실랑이 끝에 줄까지 생겼다. 모처럼 북적이는 풍경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 샘플을 다 마신 아이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말했다.


“이 쿠폰 가져오면 카페에서 음료 한 잔은 무료에요. 꼭 놀러와요!”


어제는 시큰둥했던 아이들이 ‘진짜요?’, ‘꼭 갈게요!’하며 새끼손가락 약속까지 하고는 각자의 차로 흩어졌다. 준비한 샘플이 거의 떨어져 갈 무렵,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사람이 많네요.”

"어? 너구나! 안 그래도 고맙다는 말 꼭 전하고 싶었는데."

“저는 그냥 얘기만 한 건데요. 실제로 한 건 언니잖아요.”


쑥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여 발끝으로 바닥을 긁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나저나 우리 이름도 몰랐네? 나는 이지안이야.”

“이지우.”

“지우? 이름 예쁘다. 잘 어울려.”


내가 웃자, 지우는 또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럼 지우가 내 첫번째 단골 손님이 되는 거네?”


장난스럽게 말하자 지우가 힐끔 나를 바라보았다.


“뽑기도 못 했는데요?”

“아, 여기! 아직 남았어.”


지우가 조심스럽게 하나를 뽑았다. 혼자 볼 생각인지 쪽지를 숨기려 하길래, 뒤로 가서 몰래 슬쩍 들여다봤다. ‘낯선 만남 속에서 새로운 인연이 시작될지도?’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멜론소다 주세요.”


행운의 색은 초록. 푸르게 물든 가로수 풍경과 어울리는 맛. 지우의 목소리와 함께, 여름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지지가 드디어 만났어요. 둘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다음주 화요일, 세 번째 에피소드로 만나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멜론소다, 혹은 생강라떼] 임대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