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는 왜 자기 꽃가루로 번식하지 않을까

침엽수의 철벽 방어: 자가수분 금지

by 어제와다른오늘
AI가 만든, 침엽수 꼭대기에 달려있는 암꽃

침엽수의 생존 과제: 타가수분

산책을 하다 보면 침엽수의 솔방울이 이상할 정도로 나무 꼭대기 근처에만 달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띌 것이다. 왜 아래쪽은 텅 비어 있고,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만 열매가 달릴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침엽수가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라는 한계를 넘기 위해 선택한 생존 방식에 있다. 침엽수는 자기 꽃가루를 피하고 다른 개체의 꽃가루를 받아들이는 타가수분을 통해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며, 이를 위해 꽃과 열매의 위치까지 치밀하게 조절하는 전략을 발달시켜 왔다.


시공간 분리를 통한 자가수분 회피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다.

암꽃과 수꽃이 성숙하는 시기를 서로 달리하는 자웅이숙(dichogamy)을 통해 자기 꽃가루가 스스로에게 닿는 일을 막는다. 어떤 경우에는 수꽃이 먼저 피어 꽃가루를 날리게 하고, 반대로 암꽃이 먼저 꽃가루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경우도 있다.

공간적으로도 암꽃과 수꽃의 배치가 분리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암꽃은 나무의 상부에, 수꽃은 하부 가지에 형성된다. 이는 꽃가루가 위로 올라가기보다 아래나 옆으로 퍼지는 특성과 중력을 이용해 자가수분 가능성을 줄이려는 배치이다.


바람과 형태의 힘: 풍매화 전략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풍매화 전략이 핵심적이다.

침엽수는 매우 가볍고 수량이 많은 꽃가루를 만들며 바람을 통해 먼 거리로 실어 보낸다. 특히 소나무 속(Pinus)과 같이 공기주머니를 가진 꽃가루는 공중에 더 오래 떠 다닐 수 있어 이동 범위가 넓다.

암꽃에서는 수분구라고 불리는 이슬방울같은 액체가 암꽃 끝에 형성되는데, 공중을 떠다니던 꽃가루가 이 물방울에 달라붙은 뒤, 액체가 건조되거나 흡수되면서 꽃가루가 암꽃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자가수분 차단의 보루: 유전적 안전장치

화학적·유전적 방어도 존재한다.

자가불합화(self-incompatibility) 기작을 통해 자기 꽃가루가 암술에 닿더라도 수정을 차단하려 노력하지만, 침엽수에서는 이보다 '배(embryo) 도태' 방식이 더 지배적으로 작용한다. 설령 자가수분으로 수정이 이루어지더라도, 발달 과정에서 유전적 결함이 있는 배를 스스로 사멸시켜 불량한 종자가 맺히는 것을 원천 봉쇄한다.


높은 곳의 열매: 왜 잣 채취가 힘든가

암꽃이 나무의 윗부분에 형성되는 구조는 자가수분을 피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인간에게는 잣을 얻기 어렵게 만든다. 잣나무의 솔방울은 대부분 높은 가지 끝에 달리고, 익는 데 1~2년이 걸린다. 단단히 닫힌 솔방울을 따고 열어 씨를 꺼내기까지 손이 많이 간다. 이 때문에 잣 채취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노동 강도도 높을 수밖에 없다.


종의 번영을 위해

위 전략들은 결과적으로 자가수분을 배제하고 다른 개체와의 유전자 교류를 촉진한다. 즉, 암꽃을 더 높은 위치에 두거나 개화 시기를 어긋나게 하고, 공기주머니가 달린 꽃가루를 바람에 실어 보내는 등 다양한 전략이 모두 타가수분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작동하고 있다.

인간이 잣을 따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따위 안중에 없다. 나무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종의 번영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는 왜 미역을 식물이라고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