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의 고독한 사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 아하스페르츠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모순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고 그 자유의 오용으로 원죄의 굴레를 씌웠는가. 수천 년 이어진 금기와 고난은 과연 신의 사랑을 증명하는가, 아니면 모순의 증거인가. 그의 사유는 단순한 신학 논쟁을 넘어 인간 삶의 의미와 존재 자체를 정면으로 겨누며, 신앙의 기반을 흔든다.
끝없는 생명 속에서는 모든 날이 오늘과 같아져 삶에서 긴장과 의미가 사라진다.
—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브
아하스페르츠는 영원한 천국조차 허망하다고 본다.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에서는 하루하루를 가르는 경계가 사라지고, 선택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 가능한 행위로 전락한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오히려 죽음이라는 유한성의 압박이다. 매 순간이 무게를 갖는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며, 고통 없는 영원은 축복이 아니라 공허한 반복에 불과하다.
아하스페르츠의 회의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끝없는 행복은 끝없는 불행만큼이나 방향성을 상실한다. 불멸의 존재들이 삶의 의미를 잃고 파멸로 향하는 상상은, 고통과 결핍이 제거된 세계가 결코 더 나은 세계가 아님을 드러낸다. 인간의 감동과 성장은 주어진 구원 속이 아니라 상실과 노력, 실패와 선택의 과정에서만 피어난다. 고통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아하스페르츠는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다"고 선언한다. 신은 절대적 실재가 아니라, 인간이 불안과 희망을 견디기 위해 창조한 의미의 형상일 뿐이라는 통찰이다. 이는 신앙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신을 통해 인간 자신을 직시하게 만든다. 신은 우리의 투영이자 필요에 따른 구성물이다.
이러한 인식이 아하스페르츠를 사유의 중심이 아닌 체제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이유다. 그의 사유가 틀려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정직하고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의 모순을 정확히 지적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삶을 견디기 위해 의지하는 위로와 약속마저 해체한다. 종교는 개인의 사유 체계가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장치인 이상, 이런 회의는 내부에서 용납되기 어렵다. 게다가 그는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거나 대체 신을 세우지 않는다. 오직 질문만 남길 뿐이다.
인간은 질문보다 대답을, 자유보다 안정을, 사유보다 위로를 더 자주 선택한다. 그 결과 아하스페르츠는 설득력 있는 사상가로 남되, 따를 수 있는 예언자나 지도자는 되지 못한다. 그는 고독한 방랑자로 퇴장한다.
이 소설은 크나큰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신도, 영원도, 약속된 의미도 없이 인간은 자기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독자는 외면과 동조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하지만 『사람의 아들』은 그 이후를 보여주지 않는다. 질문만 던진 채, 작가는 뒤로 물러난다. 주류에서 이탈을 거부하며 안전할 수 있지만, 이미 불을 질러놓고 도망간다면 아하스페르츠에게 붙잡힌 삶의 무게는 독자가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질문에 동조한다면, 삶은 이전과 같지 않다. 위로는 약해지고, 선택과 행동,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이 훨씬 더 커진다. 이 소설이 남기는 허무와, 그 허무 속에서 자신의 삶을 견뎌야 하는 책임 전부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