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은 언제 개인의 몫이 되는가 ― 『상실의 시대』

by 어제와다른오늘
(작은 이미지) 도서 『상실의 시대』 표지 이미지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프롤로그 ― 돌아보니, 그 질문은 거기서 시작됐다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을 때, 나는 1968년이라는 말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그 시절 일본 사회의 사상사나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했다. 책을 덮고 남은 감정은 훨씬 단순했다. 왜 이 소설에는 이렇게 자살이 많은가. 왜 이 죽음들은 가난이나 억압, 명확한 폭력으로 설명되지 않는가. 설명되지 않는 상실이 반복된다는 점이 오래 마음에 걸렸다.


그 질문을 붙든 채로 책을 더 읽었다. 임철우의 『봄날』을 완독했고, 자연스럽게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을 다시 정리했다. 한국의 권위주의 시대를 통과한 문학 속에서 죽음은 언제나 구조와 폭력, 책임의 언어로 설명되었다. 이어 장융의 『대륙의 딸』을 읽으며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를 훑었다. 국가 폭력과 혁명, 생존의 압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짓누르는지 또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여러 사회의 역사와 문학을 오가다 문득 다시 『상실의 시대』로 돌아왔다. 그때 비로소 떠오른 것이 1968년이었다. 우연히 김누리 교수님의 <차이나는 클라스>를 보면서, 나는 그 시기가 지닌 혁명적 에너지가 소설 속 상실과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왜 이 소설의 상실은 끝내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는가. 왜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이 남았는가. 『상실의 시대』는 그렇게 뒤늦게, 68혁명이라는 좌표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청춘 소설의 얼굴을 한, 질문의 시대에 남겨진 기록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가장 오래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왜 이 소설 속 죽음들은 사회의 책임으로 환원되지 않고, 끝내 개인의 몫으로 남는가.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성장, 죽음을 다루는 청춘 소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여기서 말해지는 상실은 특정한 불행이나 사건의 결과라기보다 살아 있음 자체가 설명되지 않는 상태에서 비롯된다. 등장인물들은 가난이나 억압, 명확한 폭력에 의해 무너지는 대신, 삶의 의미가 더 이상 붙잡히지 않는 순간 스스로 생과 이별한다.


이러한 상실의 양상은 한국 문학에서 익숙한 '구조적 고난 → 개인의 비극'이라는 서사와는 분명히 다른 결을 이룬다. 그리고 이 차이는 단순한 작가적 취향이 아니라, 이 소설이 태어난 시대—1960~70년대, 세계가 삶의 의미 자체를 질문했던 시간—와 깊이 맞닿아 있다. 『상실의 시대』는 바로 그 질문의 시대가 개인의 내면에 남긴 흔적을 기록한 소설처럼 읽힌다.


폭력 없는 사회가 낳은 고통

작품에서 죽음은 사회적 피해가 아닌, 삶의 방향을 잃은 개인의 판단으로 등장한다. 고통은 누군가에게 받은 폭력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감정 배경에는 일본이 겪은 1960~70년대의 사상적 흐름이 있다.


김누리 교수의 말처럼 '1968년'은 세계가 존재의 의미를 질문한 해였다. 프랑스, 독일, 일본의 학생들은 기성 질서뿐 아니라 삶의 의미까지 묻는 ‘실존적 혁명’을 경험했다. 일본의 전공투 운동은 그 중심에 있었고, 하루키 세대의 정서적 토대를 만들었다. 『상실의 시대』는 바로 이 '질문하는 시대에 태어난 개인'이 의미를 찾지 못해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1968년의 혁명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정치적 성과는 제한적이었고, 많은 질문은 제도 속에 흡수되지 못한 채 남겨졌다. 그 결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공동의 과제가 되지 못한 채, 개인의 내면으로 흘러들어 갔다. 『상실의 시대』는 그 질문을 혼자서 떠안은 세대의 초상처럼 읽힌다.


68혁명의 부재, 한국 문학의 다른 결

반면 한국은 군부 독재, 산업화, 생존 중심의 사회 속에 놓여 있었다. 68혁명이 촉발한 내면적 질문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 문학에서 자살은 지금도 대체로 구조적 고통의 산물로 묘사된다. 가난, 차별, 관계 붕괴처럼 외부 요인이 중심이며, '내면적 상실'은 개인의 사치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68혁명의 부재가 만든 내면적 민주주의의 결핍"이라고 진단한다. 사회가 너무 거칠게 개인의 삶을 압박하면,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무게를 말할 수 없게 된다.


상실을 말할 수 있는 사회인가,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인가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에서 '내면의 상실'이 자살의 이유로 인정받으려면, 사회는 얼마나 더 민주적이고 안전해져야 할까? 하루키는 '살아 있음 자체가 고통'이라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회야말로, 68혁명을 통과하며 얻은 '내면의 자유'를 가진 사회인지도 모른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문학이 정면에서 다루는 것,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척도다.


상실의 시대가 남긴 질문

결국 이 소설은 단순한 청춘 로맨스가 아니다. '상실을 말할 수 있는 사회'와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의 경계를 보여주는 문학적 실험이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통해 상실의 이유보다도, 그 상실을 말하고 감당할 수 있는 사회의 조건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일본 사회를 이상화할 생각은 없다. 군국주의의 경험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많은 나라가 공유한 역사다. 다만 상실과 무력함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비교적 일찍 획득한 사회라는 점은 부럽게 느껴진다.




참고자료

교양 Voyage,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자" | '독일의 68과 한국의 86' 김누리 교수 | 차이나는 클라스 | JTBC 191030 방송, YouTube, 2022, https://youtu.be/d1H2kFL0jXs?si=JOiuZRgMJiucBaL5


한겨레신문, (2018년10월 14일), 김누리 교수, "[세상 읽기] 68혁명 50주년과 한국의 특수한 길",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5766.html#ace04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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