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라는 패턴
어떤 인물은 한 번 쓰이고 버려진다.
그런데 어떤 인물은,
이야기가 바뀔 때마다 다시 태어난다.
죽어도 다시 돌아오는 인물,
끝없이 떠돌아야 하는 인물.
아하스페르츠가 그렇다.
아하스페르츠, 혹은 '방랑하는 유대인' (아하수에로스, Ahasuerus).
예수를 조롱한 대가로 그는 저주를 받는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너는 영원히 떠돌 것이다."
그는 죽지 못한다.
멈출 수도 없다.
끝내 도달할 수도 없다.
이 전설은 하나의 패턴을 만든다.
방황 / 반복 / 탈출 불가.
그리고 이 패턴은, 이후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개선문』 속 라비크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파리로 망명한 외과의사다.
그는 이름도, 국적도, 미래도 없다.
사랑은 반복해서 실패하고, 삶은 늘 임시적이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정착'이 아니라 버티기에 가깝다.
작품 속 한 인물(자이덴바움)은 '지하 묘지' 술집에 모인 망명자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결코 못 벗어나요. 아하수에로스의 후예들이지요. 아니, 그 늙은 방랑객인 아하수에로스조차도 절망할 겁니다. 오늘날엔 서류 없이는 멀리 가지도 못하니까요.
— 레마르크, 『개선문』 제2권, 민음사, 2015, 325쪽
'아하수에로스의 후예들'란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들의 현실에 더 가까운 정의다.
그들은 떠도는 것이 아니라,
떠돌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하스페르츠가 신의 저주라면,
라비크는 역사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다.
『사람의 아들』은 이 인물을 한 단계 더 극단으로 이끈다.
여기서 아하스페르츠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설명하는 장치가 된다.
예수가 '구원'이라면,
그는 '구원 없음'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구원의 질서 안에 포함되지 못한 존재.
그는 죄인이 아니라,
구원에서 배제된 인간이다.
『퇴마록』에서 이 패턴은 또 다른 방향으로 변주된다.
여기서 아하스 페르쯔(아하스페르츠의 변형 표기)는 단순한 방랑자가 아니다.
그는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로서 시간을 축적해 온 끝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환멸을 극단까지 몰아간 존재다.
그 힘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결국 세계 자체를 파멸로 끌고 가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방황은 점점 분노로 변하고,
반복은 집착으로 굳어지며,
탈출 불가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향한다.
끝나지 않는 존재는 결국,
세계를 끝내려 한다.
그리고 이 패턴은,
현대에 이르러 하나의 틀처럼 굳어진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유중혁은 이 패턴의 가장 현대적인 형태다.
적어도 본편의 전반부까지는, 그는 전형적인 '회귀자'로 읽힌다.
그의 저주는 '회귀'다.
죽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세계를 반복한다.
하지만 반복된다고 해서 더 나은 결말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끝에 가까워질수록 더 큰 절망이 기다린다.
회귀는 축복이 아니다.
가장 무거운 저주다.
그는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계속 되돌아오지만,
그 선택들조차 결국 이야기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매번 확인할 뿐이다.
아하스페르츠의 저주는 이제
신도, 역사도, 철학도 아니다.
이야기 구조 그 자체가 되었다.
아하스페르츠는 죽지 않는다.
그를 죽이지 못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 구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황하고,
반복하고,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
우리는 그 구조를 계속해서 쓰고,
계속해서 읽는다.
그래서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김독자 는 이야기를 '읽는 사람'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이야기를 이용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유중혁을 기억하고,
그의 반복을 따라가며,
그의 방황을 끝까지 지켜본다.
그 순간, 우리는 단순한 독자가 아니다.
아하스페르츠의 저주를
함께 유지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또 하나의 아하스페르츠를 만들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