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꽃이 진 후 열매를 맺는다. 심지어 무화과는 꽃피우지 않고 달콤한 열매가 열리는 걸 보면 타고난 생명체의 대를 잇고자 하는 본능이 진화해 온 결과일 테지.
좋아하는 과일이라면 생각만으로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홍옥 사과이다. 예전에 많이 좋아했고, 가을이면 흔히 사다 먹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이름도 모르는 과일이 많아졌고, 보기만 해도 풍성해지는 과일에 떠밀렸나. 눈 씻고 찾지 않으면 스쳐 지나칠 만큼 보기 드물어졌다. 맛있게 먹는 것과 달리 좋아하는 것은 다른 건지 홍옥을 대신할 만큼 더 좋아하는 과일이 아직 생기진 않았다.
보기 좋고 한눈에 쏘옥 들어오도록 잘 익은 고유의 빛깔로 한 입 베물고 싶도록 과일이 줄지어 진열되어 팔리는 건 당연하다 생각했다. 오늘 이 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포도 농사를 평생 지어 오신 분이 바쁜 아들을 대신해 기거할 방을 구해주러 오셨다. 바쁜 농사철인데, 틈을 내어 오셨단다.
이제 새 잎이 나오고 있으려나. 포도 수확할 철도 아닐 텐데... 뭐가 그리 바쁘실까 싶었다.
‘갓 잡아온 싱싱한 제주 은갈치가 왔어요.’ 상품 우수성을 알리는 트럭의 녹음테이프 틀어놓은 마냥 거침없이 몸으로 체득하신 포도 농사법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 경험 얘기만 듣는데, 맘은 당장 포도밭으로 달려가 같이 움직이고 있다. 포도 수확이 끝난 후 다시 일 년 농사가 시작되신단다. 새 줄기 올라올 가지를 남겨두고, 오래된 가지 잘라주는 전지 작업을 시작으로 나무 밑에 거름도 듬뿍 해줘야 하고. 우리 시엄니 텃밭 농사에 거름 옮기는 일만 도와줘도 농사 반은 지은 거랑 다름 없다셨다.
한 두 그루 아닌 넓디넓은 포도밭 거름을 하는 일 큰 일 중에 하나라신다. 나무 밑에 똥거름을 많이 해 줄수록 열매가 달고 맛있다니... 자연 생명체끼리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연결이 중요한 포인트 같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손은 더 바빠지신단다. 꿀 빨아먹으며 벌들이 할 꽃 수정을 사람이 거들 수밖에 없다는 거. 그만큼 벌이 많지 않아 그런 것인지. 여러 이유들이 있을 거 같다.
자연 순리대로 움직여 열매가 맺히면 좋을 텐데... 원하는 만큼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사람이 끼여 일 하는 게 마음이 쓰였다.
“아무리 비싸도 사람을 쳐대갖고 포도 알을 솎아주지 않으믄 1년 농사 망해요.”
꽃이 활짝 피고 진자리 포도 알이 열리기 시작할 때가 가장 바쁜 시기란다. 알이 서로 엉겨붙어 있는 채로 놔뒀다간 골고루 익지 않는 게 많아진다니...
그러고 보니 포도송이째 들고 달달한 걸 알송 알송 잘 따먹었다. 근데, 포도 꽃을 직접 본 적이 없네.
“포도도 꽃이 펴요?”
“그람요. 노리끼리하게 생긴 꽃이 있어요.”
내 머릿속 가득 등나무 탐스러운 보라 꽃송이. 포도 꽃도 그리 생기지 않았을까 막연히 생각했던 거 같다. 그동안 포도 꽃이 어찌 생겼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고 본 적도 없다는 걸. 세상에는 정말 모르는 거 투성이다.
포도 입장에선 사람들이 솎아내는 필요 없는 알이 어디 있으랴? 한눈에 들고 손에 들려지기 위해 포도 알끼리 엉켜 상품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솎이는 거. 나부터 엉성하게 포도알이 햇볕을 골고루 받아 달달한 포도송이를 들고 있으니 뭐라 할 말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이 미리 계획한 것에 맞춰지고 길러지는 것에 많이 씁쓸할 뿐.
포도알을 솎아 내고 포도 모양을 잘 잡아 봉지 속에 쏘옥 들어가게 싸는 일 숙련된 손에서 나오는 거란다. 수확이 끝나고 이듬해 포도가 열려 수확하면 되는 저절로 열리고 따는 원시시대의 것이 아니었다.
한정된 땅덩어리에 사람 수는 많아졌으니 맛 좋고 품질 좋아 수확량도 많은 방법을 계속 고안하는 이유일 수 있겠다.
이 어르신의 이야기에서 과학영농이란 말이 살짝 언급되셨다. 일손이 많이 부족해서 농사에 깊숙이 관여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평생을 포도농사지으신 분께서 과학영농이란 말을 하시는 걸 보니 기계화, 첨단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