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기생충'은 말한다.

정답은 없으니 각자가 생각해 보라고.

by 서비휘

사람이 만족하는 삶이란 있는걸까. 있다면 기준은 뭘까. 한 편의 영화가 곳곳에 존재하는 삶의 문제를 강렬하게 던진다. 한 면만 보지 말고 360도를 돌아보라고. 그렇지 않으면 삶과 죽음은 같은 선상에 있어 언제든 누구든 위협할 수 있을거라고.


아파트, 상가, 다가구, 다세대 주택이 많은 오래된 동네에서 부동산 공인중개사로 올 3월부터 일하고 있다. 보통 하는 일이 같은 동네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계약 만기로 인한 이사를 돕는 일. 가끔씩 직장이나 학업 문제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다. 삶의 터전을 옮길 때 문제없는 자산 지킴과 더 안정된 곳으로 가길 원하며 사무실을 찾는다.


대학교가 인근에 있다 보니 원룸이나 투룸 다가구의 공급자도 수요자도 많다. 코로나 19로 대학생이 학교엘 가지 않으니 지방에서 올라오든 수도권에 살든 방을 구하는 학생들도 많이 줄었다. 혼자 사는 일반인도 옮기질 않고 살던 곳에 연장해서 사는 모양이다. 시기로 봐선 이 맘쯤이면 방이 없어 못 들어가고 다가구의 반 지하 방도 꽉 차 야 할 때인거다. 지금은 원룸, 투룸도 텅텅 빈 곳 많으니.

전세면 그나마 빨리 나갈 수 있다. 임대인도 전세를 줘봐야 남는 장사 아니고, 월세를 받는 게 나은데, 그마저 찾는 사람이 강제로 없어진 거다.

지상의 방들도 비어 있지만, 문제는 다가구 지하방이다. 오래전부터 월세로 나와 있었다. 주변 풀옵션 원룸이나 지상층보다 가격이 싸다 보니 보러 오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면적이 보통 원룸보다 훨씬 넓어 집 안에서 왔다 갔다 할 공간 확보와 돌아누워 뒹굴뒹굴할 곳이 있는 것은 맘에 들어한다. 문제는 화장실, 나오면서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멋쩍게 웃으면서 하던 얘기가 있다.

“아~ 봉준호 감독이 생각나요. 영화만 안 봤어도......”

그랬다.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기생충’이란 영화를 말하는 거다. 워낙 유명한 감독의 영화에 무슨 무슨 상을 받을 때마다 뉴스에 나왔고, 그 상이 발표되는 순간, 벌떡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내거나 만세를 부른 사람을 볼 정도로 많은 사람이 본 영화였다.


그럼에도 난 아직 처음부터 끝까지 그 영화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희귀종, 별종, 별난 종이라 갖다 붙여도 손색없을 장본인이 여기 있는 거다. 제목만으로도 끌리지 않았다. 어릴 적 기생충 약을 봄, 가을 보약 챙기듯 주는 걸 빼다 빼다 결국 붙잡혀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 약을 먹고 나면 그 옛날 퍼세식 화장실을 몇 날이고 못 갔던 기억이 났다. 물론 그 기생충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만, 숙주의 몸에 붙어 기생하는 기생충에 버금가는 기생인이 나올 거 같았다.


안 봐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 예고편으로 충분했다.

부동산 일을 하면서 달랐다. 영화를 봐야 집이나 방을 구하는 이들의 맘을 십 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영화를 봐야 했다. 그렇게 감독상, 작품상을 받은 작품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영화에선 최상위층 대저택과 최하위층의 지하방을 보여주고 있다. 최상위층 대저택은 근처 지나가다 인기척 먼 기운이 뿜어 나옴만 느끼며 저곳에 사는 이들도 사람일까 만약 사람이라면 범접할 수 없는 이들이겠지. 그런 생각만 잠시 해 본 것도 같다.


이 또한 우리 삶의 일부분일 텐데, 들어가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더더 관심 밖의 일처럼 내 몰았는지도. 사실 어떤 기회로 잠시 들어가 본들 느껴지는 거리감은 편치 않았을 듯. 반면 최하위층의 반지하방은 가까웠다. 서울에서 지금 일하고 있는 사무실 근처엔 다가구 지하방이 많았다. 지방 살 땐 다락방은 봤어도 아무리 시골이어도 반 지하방은 없다. 작은 아이 4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왔다. 내가 어릴 땐 서울 아이 지방으로 이사 오면 서울내기서울내기 친구들이 놀려 불렀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서울 아이들은 시골서 왔다고 지금도 촌놈 촌놈 따라다니며 부른다고 했다. 아이가 집에 와서 그렇게 부른다는 말을 들을 땐

'고놈들 친해지고 싶은거로군!' 정도로 생각했다.

어느 날 저녁, 집 근처 공원에서 찾아가는 음악회가 온다고 해서 아들이랑 구경하러 갔다. 아들을 발견한 여자아이들이 따라다니며 촌놈 촌놈 부르는 것이었다. 어두워서 엄마가 옆에 있다는 것도 그 동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모르는 얼굴이라 더 몰랐을 테다. 별 대수롭지 않는듯 지나가듯 말했기에 심각하게 듣지 않았었다. 직접 옆에서 듣자니 아들에겐 상처일 수 있겠구나.

덜컥 걱정이 되었다.

상처 받았을 아들을 걱정하던 나에게 아들은 자기 친구들이 더 촌놈이라고 말하는 거다.

'엥 이거이 무슨 말?' 세련되고 표준어를 구사하는 시골 사는 이들의 로망인 서울 사람을 더 촌놈이라니 무슨 말인고 했다.


다 듣고 났을 땐 이 아들 뉘 집 아들인고 싶은 것이다. 작품에 비긴다면 그야말로 대작이었다.

“어머니, 저는 울산 살 때도 대단지 아파트에 살았고, 지금도 아파트에 살잖아요. 그러니까 도시 사람이잖아요.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처음보는 반지하였어요. 사회시간 선생님이 아파트는 도시에 있다고 했거든요.”

“글치 글치 아들 니말이 백번 맞대이.”

한창 사춘기 시작할 예민할 시기라 걱정을 하던 차에 말하는 논리가 맞는지는 둘째치고, 아이가 저렇게 주눅들지 않고 슬기롭게 이기는 듯 해서 고마웠다. 놀림받다 주눅 들어 말 한마디 못하고 비뚤어질까 괜한 염려를 한 것이다. 아들의 얘기를 듣곤 걱정 꽉 붙들어 매고 나니 반 지하 그런 방도 있나 보다 지나치듯 지나갔다.

몇 년 후, 내가 이곳저곳 다니며 반지하 방을 소개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이야. 잊고 있던 반지하와 얽힌 이야기가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사람은 정말 한 치 앞을 모르고 살아가는 게 맞다.

우리 사무실과 내가 살고 있는 집 주변을 돌다 보면 반 지하 집들 창문이 땅 위 지면과 맞닿아 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의 발 부분부터 몸 전체가 올려다 보일까 했다. 영화에서 만취한 사람들 아무 데나 소변 누는 장면 묘사. 술이 만취될 정도로 마시면 정신없이 아무 데나 실례를 하는 것인지 영화를 본 사람은 조심하겠지. 해야만 한다. 누군가의 생활터전에 대고 아무렇지 않게 실례를 하는 게 실례되기에.

화장실 높이가 방이나 거실보다 높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본 나도 안내하면서 흠칫했다. 역류를 막기 위함이라고. 영화를 본이라면 장마철 홍수가 났을 때 제대로 실감 나게 표현되었다. 상상 이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이 그래서 더 거부하는 듯하다.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는 지하방을.


요즘엔 인근에 빗물 펌프장이 있어 물 차오를 염려가 덜한다는데. 올여름같이 폭우가 예상을 뒤엎을 경우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인 거다.


누군가에게 추억과 낭만, 안전과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비가 또 다른 곳에선 삶이 피폐하고 돌이키기 힘든 고통의 비라는 것을. 마냥 촉촉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평온함만 느끼기 힘들 거 같다.

간접경험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영화.


이런 다각도의 삶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고민하고 파고든 감독님. 모두가 겪을 수 있고 돌아볼 수 있는 문제를 던져준 감독님. 실오라기 보다 가늘디가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나 행동들. 여러 형태 사람들이 주눅 들고 업신여김 당한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할 땐 그 누구보다 잔인하고 잔혹해질 수 있음을.

누가 그들을 나쁘다고 나빴다고 못됐다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을까.


대저택에 사는 사람도 지하방에 사는 사람과 관계 맺고 어떤 연결고리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면 기생이 아닌 서로 공생하는 삶을.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만 강요해서 안 될 일이다. 서로서로 도우며 도움되는 삶이 되는 풀리지 않을 풀고 싶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영화는 던져주고 있다. 각자가 생각해 보라고.


작고 소박하지만 인류애가 있는 지금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을

더 나아가 지구를 살리는 일에 가치로움을 두는 삶을 나부터 방향을 잡아보련다.

매일 무너지는 멘탈을 꽉 부여잡을 수 있는 대저택의 사람들도 반지하의 사람들도 동등히

바라볼 수 있는 무게중심을 내 맘부터 부여잡는 일.

좀더 나은 가치로운 일을 하는 당당함을 장착시키다 보면 한발 더 가까워질까.

일단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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