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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Nov 08. 2021

나는 이렇게 히피 펌 여자가 되었다.

내 안에 ‘지중해’ 있다


9년 전쯤 어느 날, 어깨 아래의 긴 머리를 하고 있던 나는 어느 후미진 미용실에서 값싼 파마를 했다. 홀라당 타버렸다.


‘아… 내 머리….’


이런 사정으로 만원  장도 귀하게 살림을 살던 여자가 어쩔  없이 비싼 미용실을 이용하게 되었다. 우리 동네 젊은 부부 미용사가 운영하는 미용실이었다. 배우 박근영이 손자를 데리고 왔던 . 나는 남자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겼다. 남자 미용사가  실력이 있을 거라 여겼다. 나도 여자이면서 사회능력을 평가할  남자가  낫다는 편견이 있었던  같다. 박근영의 손자도  남자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겼다. 남자 미용사는  머리가 너무 많이 손상되었다면서 아주 짧게 잘라 냈다. 나는 애매한 짧은 단발머리가 되었다. 단발을 하고 펌을 다시 펴는  15 원이 들었다. 당시로   비싼 편이었다. 머릿결은 푸석푸석. 형태는 70년대 간난이 단발. 남편 외벌이에 대출을 잔뜩 끼고 아파트를 구입한 부담감으로 짠내나는 살림의 부작용을 간난이 단발머리가 모두 말해주는  같았다.


나는 내 머리를 망친 미용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싼 가격만 생각한 내 궁색이 창피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서 나의 찌질함을 거부하듯 후미진 미용실을 완벽하게 지워 냈던 것은 아닌지. 이런 기법이 생을 살면서도 완벽하게 적용되면 좋았겠지만 찌질한 기억이 다 지워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릴 때엔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가야 미용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시절의 내게는 미학적 헤어스타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어머니가 무쇠 같은 가위를 들고 보자기를 내 어깨에 둘러 씌운 다음 내 머리를 서걱서걱 잘랐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나에게도 보는 눈이 생겨서 다른 아이들처럼 예쁜 컷을 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가위를 든 어느 날은 어머니에게 요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주문을 했던 것 같다. 당연히 단발만 전문으로 하는 무쇠 가위손인 어머니가 잘라 준 머리가 마음에 들리 없었다. 난 이제 꼬맹이가 아니었으니까. 어머니가 없는 사이에 가위를 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찔끔 찔끔 잘라 냈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 머리가 자랄 때까지 몇 달을 창피와 굴욕으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 뒤로 미용실에 가는 것조차도 내겐 두려움이 되었다. 미용실을 갈 때마다 두근두근 심장이 절구질을 해댔다. 내 머리 모양이 맘에 들지 않을 가봐서.


고2 때가 생각난다. 나는 아침잠이 많아서 지각을 자주 한 편이었다. 우리집은 버스정거장까지 5분 거리. 나는 아침마다 담장 너머로 버스가 저만치 오는 것을 보며 대문을 박차고 혼신을 다해 달리기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당시 나는 앞머리를 가지런한 뱅 스타일로 하고 턱선까지 자른 단발머리를 하고 다녔다. 물론 미용실에서. 그날도 지각을 했다. 1교시가 지리수업이었다. 수업 중이라 조용한 복도를 지나 2-1반(우리 반) 교실 뒷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지각을 했으니 오죽 눈에 잘 띄었을까. 선생님께서 별 존재감 없던 내게 말했다.


‘인형 같네.’


맞다. 나는 키 번호 7번? 9번의 작은 소녀였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도 오글거려 민망한 말이지만, 내가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했다. 혼나진 않았지만 그 뒤로 나는 지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고등학교 땐 단발로 잘랐다가 어깨까지 길어졌다를 반복하며 살았다.


대학생이 되자 어머니에게 펌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전주시내의 미용실로 데려가셨다. 조금 의아했다. 혼자 하고 오라거나 읍내에 있는 미용실에 데려갈 줄 알았다.


‘아오… 내가 펌을 하러 전주 시내로 나간다. 난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까.’


어머니는 빠마가 오래갈  있게 강하게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머리는 빠글빠글 볶아졌다. 머리가  삼각김밥처럼 부풀어 올랐다. 당시 인기 배우 최명길이 했던 탤런트 펌이라고 했다. 최명길이 탤런트라서 탤런트 펌인지   이름이 탤런트 펌인지 아직도 정확한 사실을   없지만, 루트가 둥근 것이 아니라 삼각형이라고 했다. 펌의 강도는 지금의 히피 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나는 영국인 원어민이 강사인 영어학원에 다녔는데 그 펌 때문에 내 영어 이름이 ‘타냐’(왠지 히피적이다)가 되었다. 내 친구는 검고 긴 생머리라서 ‘수지’(왠지 청순해 보인다)가 되었다. 나는 청순해 보이는 친구의 영어 이름이 부러웠다. 나도 청순한 스타일인데 내 머리 때문에 ‘타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작은 얼굴 덕에 모양새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학교에 가자 친구들이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리고 20대 사회인으로 살 때에는 부드러운 웨이브를 고수하거나 찰랑찰랑한 생머리로 살았다. 내가 부러워했던 청순한 머릿결로. 머리에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머릿결은 빛이 나고 얼굴이 새 하얗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갓 결혼 때엔 쇼핑몰(화정 세이브존)에서 작은 신발가게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가게 앞에는 와코루 속옷 가게가 있었다. 와코루 사장님 헤어스타일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그야말로 히피 펌의 정석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가늘게 부스스한 머릿결이 매력적이었다. 부푼 머리가 마치 솜사탕처럼 가벼워 보였다.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그녀는 항상 유니폼처럼 검정 슈트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히피 펌과 검정 슈트가 묘한 매력으로 발산되었다. 백화점 경영을 하듯 격식을 갖춰 손님을 응대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화려함과 지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 속으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나도 저 여자처럼 나이 들면 좋겠다. 자유도 지성도 포기하지 않는.’


애 엄마가 된 나는 간난이 단발머리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 기분 좋은 말을 들었던 단발머리가 두려운 기억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얼마간 있다가 나는 귀를 들어낸 진정한 숏컷이 되었다. 간난이 머리로도 해결이 안 된 푸석푸석하고 건조한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냈다. 숏컷은 관리하기가 더 어려웠다. 미용실에 자주 가야 했고 짧은 머리에 펌(김남주 펌이라 했다)을 하니 이제는 상큼함은 간데없고 진정한 아줌마 같았다. 아줌마면서도 진정한 아줌마가 되어가는 것이 썩 기분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젊은 시절 찰랑찰랑했던 긴 머리에 대한 향수가 생겨났다. 젊은 날에 신촌에서 했던 브룩쉴즈처럼 우아하게 말아진 긴 머리를 다시 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내 젊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처럼. 그때부터였다. 내가 줄곧 물귀신 같은 롱헤어로 살게 된 건.


긴 머리로 살면서 머리를 짧게 자를까, 말까 고민을 한 적도 많았다. 노총에 다닐 때는 약한 근성의 여자처럼 보이기 싫어서 이 놈의 머리카락이라도 짧게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스타일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긴 머리를 오래도록 하다 보면 지루할 때가 찾아온다. 나는 그 지루함을 웨이브의 굵기나 다름으로 변화를 주곤 했다. 셋팅, 디지털, 매직, 아이롱, 트위스트(히피) 펌. 요즘은 엘리자벳, C컬, S컬, CS컬, 루즈, 빌드, 젤리펌, 그 이름도 다양해졌다. 나는 이 어렵고 복잡한 이름의 펌은 잘 모르겠고 일반 웨이브를 했다가 셋팅을 했다가의 변화 정도를 주었다. 그러다가 그것도 지겨워 몇 년 전부터는 트위스트(히피) 펌을 즐겨했다. 아마도 와코루 사장님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다시 히피 펌이 지겨워진 나는 한동안 굵은 웨이브로 살다 얼마 전 다시 히피 펌으로 회귀했다.


“정수리부터 빠글빠글 볶아주세요. 앞머리도요.”


이번엔 좀 더 세게 볶았다. 앞머리까지 뽀글거리게 한적은 없었는데 앞머리도 뽀글이다. 예상외로 주변의 반응은 좋았다. 헤어 에센스를 사러 갔는데 점원이 물건 파는 것에는 아랑곳없고 내 헤어스타일에 대해 캐 물었다. 자기는 이런 펌을 미용실에서 해주지 않는다는 둥 무슨 펌이냐는 둥. 처음 보는 아코디언 연주자는 바비인형 머리 같다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히피 펌은 미용사도 당사자도 일종의 용기의 부족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이미지가 망가질 각오 같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히피 펌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내 꼴에 대한 불안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여자에게 헤어 스타일이란 절대적인 자기표현이다. 하여 히피 펌은 나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자유를 허락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내게 허락되는 자유의 한계는 내 경험에 의해 산출된다. 그 경험은 두려움과 불안을 무뎌지게 하고 허용치를 넓혀 준다. 과거 어머니가 내게 해주신 탤런트 펌의 경험치는 오늘의 내게 자유의 초석으로 작동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머니는 내게 빠마를 해주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보헤미안의 정신을 가르쳐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다소 파괴적으로 보이는 히피 펌을 통해 나는 일상의 일탈 같은 자유를 얻고 있다.


여하튼! 나는 이렇게 히피 펌 여자로 잘 살아가고 있다. (2021.11.2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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