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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Feb 19. 2022

세리와 세영이

세리와 세영이


우리 집에는 올해로 24살, 22살의 두 아들 말고도 아날로그의 순수함을 자랑하는 6살 세리와 조금 튀는 외모의 3살 세영이가 있다. 우리 집 속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늦둥이 딸들이 있었던 것이냐 되물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세리와 세영이는 우리 집 자동차 이름이다.

2016년, 나는 쉐보레 미색 경차 한대를 구입했고 쉐보레의 이름을 따서 ‘쉐리’라고 지었다. 생애 처음으로 나의 전용 자동차를 갖게 된 것이다. 너무나 특별해서 이름까지 지었다. 온전한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 쉐리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내 발이 되어 준 쉐리 덕분에 나는 많은 호기심을 충족하며 살 수 있었다. 회사도 편하게 다닐 수 있었고 시민기자 등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쉐리는 내 시간을 절약해 주었고 나의 모든 것을 함께 했다.

그리고 3년 전, 우리는 같은 브랜드로 색깔만 다른 두 번째 경차를 구입했다. 남편 전용의 와인색 자동차였다. 나는 와인색이 주는 여성성 때문에 이름을 ‘세영’이라 지었다. 이때부터 세영이의 어감에 맞춰 쉐리도 ‘세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정부는 2019년부터 노후 경유자동차(배출가스 5등급 이상)를 대상으로 미세먼지 저감을 위해 단속을 시행했다. 당시 우리 집은 2003년 식 오래된 싼타페 RV 자동차(이하 ‘산타’)를 갖고 있었고 단속 대상으로 분류되었다. ‘산타’는 우리 가족을 위해 16년을 일했다. 오래 타긴 했지만 우리 집 사정으로는 몇 년을 더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려면 자동차 매연저감장치를 달아야 하는 것이 정부의 규정이었다. 비용은 정부가 지원했다. 하지만 우리의 싼타는 더 버틸 수 없어 보였다. 하여 우리는 매연저감장치를 선택하지 않고 대신 200만 원 정도의 지원금을 받아 남편이 탈 경차 한대를 더 구입했다. 그 아이가 ‘세영’이다.

남편은 우리의 싼타를 폐차장으로 데려갔고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싼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내게 보냈다. 눈물이 나고 마음이 쓰라렸다. 싼타와의 16년 간의 추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싼타는 우리를 수많은 여행지로 데려갔고 나는 싼타에 우리 아들들을 태워 수영장으로, 학원으로 데려다주며 열혈엄마로 살았다. 전업주부에서 벗어나 새로 취업한 회사도 싼타와 함께 했다. 남편이 서울로 출근하는 탓에 온전히 나와 함께 할 시간이 많았던 우리의 싼타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남편이 보낸 사진을 보니 기분이 너무도 이상했다. 꼭 생을 다한 가족을 화장터로 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가족을 보살피는 것에 최선을 다한, 든든한 울타리였던 싼타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두 아들은 해외 학교를 보낼 예정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G’ 광고대행사 17년 생활을 청산하고 마을버스기사 3년을 견뎌내고 이제 막 서울버스기사님이 된 참이었다. 그럼에도 싼타는 환경오염의 주범이라 몰려 처분해야 했고 남편은 출퇴근용 자동차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사정이라면 대부분의 남편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1. 아내가 타던 경차를 팔아서 좀 더 좋은 New 자동차를 구입해서 남편이 타고 다닌다.

2. 아내가 타던 경차를 남편이 타고 아내는 뚜벅이로 살게 한다.

3. New 경차의 가격으로 체면을 적당히 살려 줄 고급형 중고차를 구입한다.


내 친구 양푼의 남편 이야기이다. R주류 회사의 사장이었던 양푼의 남편은 속옷부터 양말까지 까다롭게 신경 쓸 만큼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제 작년 양푼 남편도 곧 있을 조기 퇴직을 준비하면서 투잡으로 운영했던 건축 사업을 말아먹고 또 다른 사업으로 중부시장에서 국밥집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런 폼생폼사를 미덕으로 알고 있는 양푼 남편이 어느 날 자동차를 사러 인천 중고차 시장에 갔단다. 국밥집에 중고차 구입이라… 양푼은 자기 남편이 비로소 체면을 버리고 형편에 맞는 선택을 했다고 잠시 좋아 했단다. 그런데 막상 중부시장 국밥집 앞에 나타난 양푼 남편의 차는 외제 중고차였다나……. (물론 내 글엔 웃음으로 풀어서 그렇지 양푼의 남편은 스마트하고 훌륭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그런데 내 남편은 3가지의 경우의 수에서 모두 빗겨 난 참으로 독특한 결정을 하게 된다. 3번의 경우는 처음부터 배제한다. 남편은 중고차는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생각이 깊어 사지 않는다.(아마도 검증하는 절차를 피곤해하는 듯) 처음엔 1번이나 2번의 방법을 선택하여 나의 세리를 팔아야겠다고 했다. 백수가 자동차가 뭐가 필요하냐고.

“나 이제는 자동차 없이는 안된다고…. 세리 팔면 난 은둔자로 살 거야.”

나는 세리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은둔자가 되겠다고 불평했다. 나의 절실한 투쟁이 통했는지 고민하던 남편은 자기가 출∙퇴근할 때 탈 경차 한대를 더 사겠다고 통보했고 몇일 지나지 않아 세영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 왔다. 세리를 데려올 때도 세영이를 데려올 때도 속전속결이다. 남편은 역시 스피드 한 한국사회에 참 잘 어울리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남편의 관용으로 세리는 구사일생이 되었다.

“무슨 경차를 2대나 사니?”

언니가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있는 세리와 세영이를 보고 말했다. 언니 말처럼 한 집에 경차만 2대라니. 그것도 같은 브랜드로. 경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다고 해도 이런 선택은 흔하지 않을 것 같다.

남편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렇기에 세영이를 데려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산과 바다와 강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나보다 세영이와 함께할 일이 더 많아졌다. 퇴근해 보니 남편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빙어낚시 장비를 차비하여 아들과 함께 얼음낚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남편과 아들은 춘천 어딘가에서 강 얼음에 구멍을 뚫고 빙어낚시를 할 것이다. 이번 여행도 당연히 세영이와 함께 할 것이다. 나 또한 세리와 함께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어느새 세리와 세영이는 싼타를 대신해서 우리 가족을 돌보는 아주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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