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헬로해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헬로해피 Oct 17. 2022

장맛비

장맛비가 쏟아 진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기세로 내린다. 직진의 사랑처럼 곧게, 맹렬하게 내리고 있다. 김수영은 이 비를 “결의하는 비애, 변화하는 비애”라 했던가. 마치 ‘두드드 투드득’ 총을 든 혁명가와 같다. 


이 장맛비를 보고 누군가는 그리움이 내린다고 했다. 누군가는 막걸리와 파전을 부른다고 했다. 내게 장맛비는 온 세상의 멜랑꼴리를 한꺼번에 쏟아 붇는 ‘정서의 폭음’이다. ‘토도독 토도독’ 창문을 두드린다. 마음을 노크한다. 당신의 사랑은 잘 있느냐고. 당신의 외로움은 잘 견디고 있느냐고. 멀리 떠난 당신은 안녕하냐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느냐고 물으며 내 마음을 투명하게 만든다.


라디오에서도 음악 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 있다. 멈추지 않는 비때문인지 이 깊은 밤까지 세상의 모든 비에 관한 노래가 쉼 없이 흘러 나오고있다. 이 음악비는 장마가 끝날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비 노래가 지겨워지기 시작할 무렵 장마는 끝이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를 싫어하지 못하고 그리움으로 가득 남겨두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대지를 적시고 지겨워지기 전에 떠나는 장맛비와 같아야 한다. 그래야 그리움으로 남게 된다. 향기로 남게 된다.


나는 오늘 비에 관한 노래가 이렇게 많은 지를 처음 알았다. 라디오에서 낯선 비 노래가 많이 흘러나왔다. 새로웠다. 수십억년을 내린 비도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이 표현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정서의 비에 몸을 훔뻑 적셔보고 싶었다. 김수영의 시를 비와 함께 마신다. 오늘 밤은 김수영과 함께 와인을 마신다. 김수영과 나. 비오는 밤, 나는 오늘 이것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충만하다. 


비 (1958 김수영)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 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이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화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를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위에 울리는 곡괭이 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말하는 김수영이 그리웠다. 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웠다. 그도 비가 오면 컴컴한 그림자로 뒤덮여 버리는 내마음과 닮았던 모양이다. 밤새 뒤척이다 추적추적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비의 그림자와 그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나는 그 적막한 새벽에 떨어지는 비소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비를 “움직이는 비애”라 했는가. 그가 말하는 단독성, 이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시에 마음을 싣는다. 쉼없는 현대의 속성, 멈추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의 서러움에 내 마음을 입힌다. 멜랑꼴리한 ‘정서의 폭음’이 내 마음속으로 우르르 쏟아진다.  비오는 밤, 모든 감정들이 쫄랑쫄랑 비를 따라 나선다. 쏟아지는 비는 해방감이다. 세상 모든 상처들이 투명해지는 것, 세상 모든 그림자들이 사랑스러워지는 것. 나는 모든것들에 너그러워지는 “움직이는 휴식” 같은 이 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