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 담그는 남자
광고 업종 사람들은 술을 참, 잘, 많이, 마신다. 술에 진심인 사람들이다. 나는 남편이 술을 많이 좋아한다는 말을 광고계라는 보편성으로 순화하여 자기위안 중이다. 남편은 회사 업무를 마치면 술과 번외업무를 보았는데 거의 본 업무와 비등한 시간을 할애했다.
우리집은 3호선 종점이다. 남편이 번외업무를 마치고 무사히 막차를 타면 우리집에 안전하게 올 수 있게 된다. 사는 동네가 종점일때 좋은 점이 있다. 출근할때 앉아서 갈 수 있고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할때도 내릴 타이밍 걱정없이 멍때리거나 한숨 푹 잘 수 있다. 내가 우리집을 원픽한것도 남편이 장거리 출퇴근길을 편안히 앉아서 가시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신도시 가장 끝이라 집 값이 싸다는 것은 부차적인 이유이다.(설마…… 돈이 없어서 그런건 아니고?) 그런데 남편은 이 심오한 선택을 악용한 나쁜 남자였다. 분명 신사역에서 지하철을 무사히 탔다고 연락이 되었는데 2시간이 지나도 남편은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고 다음날 확인해 보니 종점을 찍고 다시 회사로 돌아 갔다고 했다.
이런 남편이 직업을 시내버스 운행사원으로 바꾸면서 과음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밤잠을 설칠 일, 남편을 한밤중에 데리러 갈일이 없어졌다는 뜻도 되겠다. 시내버스 운행사원은 운행전 음주측정을 해야 한다. 광고업에 종사하던 때처럼 과음을 했다가는 음주측정에 걸려 근무를 할 수 없게 된다. 이리하여 남편의 과음 습관은 자동으로 사라졌다. 남편 회사에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내 마음을 이 남자는 알고나 있을까?
사람들은 버스 노동자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다. M운수회사 노조사무실 여직원 K씨는 자신이 노조위원장한테 무시당할때마다 “그래봤자 자기도 버스기사지.”라고 비하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일을 찾지 못하고 백수로 있는 사람들을 보면 “버스기사라도 해야하는거 아니야?”라며 마땅한 일을 찾지 못했을때 마지막 종착역이 버스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크나큰 생각의 오류이다. 지금은 그런 인식들이 많이 사라졌다. 아마도 서울 시내버스 노동자의 근무조건이 나름에 개선이 되면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조차도 남편이 겪어온 과정을 옆에서 지켜 보며 버스 노동자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일단 이 직업은 지각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면 수 많은 시민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매일 출근시간이 달라도 적어도 30분은 여유있게 출근해야 하며 새벽 운행과 야간 운행을 1주일 간격으로 교대근무를 하기때문에 피로감이 짙기 마련이다. 그래서 체력과 자기관리가 이 직업의 필수 항목이다. 한마디로 버스운행사원은 삶이 코너에 몰렸다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이 직업은 집중력과 성실함과 체력이 꼭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칫 집중력이 흐려지면 사고가 날 위험이 매우 크다. 거기에 강한 체력은 기본이다. 이런 근무 특색과 노동의 강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남편은 주기적으로 산행을 했다. 여가시간이 생길때마다 가까운 산을 수시로 올랐다.
남편의 산행 벗은 칠순이 넘은 분이다. 남편이 S마을버스에 다닐때 알게 된 분이다. 남편과 여러가지 성향이 잘맞아 20년이 넘는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친분을 응원하고 참 좋아한다. 친구관계에서 나이보다 같은 공감대를 얼마만큼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게해준 커플의 좋은 예시이다. 두 사람은 산, 바다, 강을 가리지 않고 자연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남편이 절친과 함께 하는것을 언제든 환영했다. 이유는 신뢰다. 나는 남편의 절친을 무한 신뢰한다. 자기 관리가 확실한 분이다. 퇴직후에도 매일 걷기를 빼놓지 않는 등 부지런한 삶은 그분의 좋은 습관 같은것이다.
두 사람은 수렵과 채집, 여행을 좋아 해서 시간이 날때마다 함께 했다. 각자 다녀온 좋은 풍경 사진과 살림에 쓸모있는 채집생활 정보도 함께 공유했다. 남자 어른들이 사소한 일상을 서로 나누며 재밌어하는것이 귀여워 보였다. 두 사람이 소∙확∙행을 하고 오는 날이면 밥상이 달라졌다. 자연산 다슬기, 참소라, 쑥 된장국, 영지버섯과 토봉령 다린 물이 밥상에 올랐다.
이런것들이 발전이 되어 남편은 한동안 술담그기를 했다. 그동안 돌배, 매실, 아카시아, 보리수, 인삼, 개복숭아, 복분자 등 많은 담근 술 실험이 있었다. 그러던 취미가 올해는 효소 담그기로 전이된 것이다. 술을 너무 많이 담근다는 내 타박이 한몫 했을것이다. 나는 남편이 집에서 담근 독한 술을 홀짝홀짝 마시는 것이 마음에 쓰였다. 내 책장을 술병으로 가득 채우고도 남아서 구석구석 술 항아리를 두는 것이 너무 고달팠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그중 가장 맛이 훌륭한 매실과 돌배 술만 담그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술을 담고 남은 매실과 채집 열매(개복숭아, 복분자는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쉽다…)를 해결해야 했다.
그 대안으로 남은 열매는 효소 발효액을 만들기로 했다. 남편은 유튜브에서 효소 발효액 만드는 법을 배웠다. 요즘은 SNS에 요리에 대한 자세한 레시피 공유가 일반화되었다. SNS덕분에 내 남편이 효소를 담그는 아름다운 세상이 도래한것이다. 이렇게 올 여름 남편은 효소 담그는 남자가 되었다.
나는 지금 진짜 효소를 마시고 있는 것인지 설탕물을 마시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패해서 번식한 미생물을 마시는지 알수가 없다. 가끔 의심이 되어서 “발효가 되려면 얼마동안 숙성시켜야 하는 거야?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럴때마다 남편은 자신이 학습한 효소 발효액에 대한 정보를 그럴듯하게 내게 설명을 해준다. 그닥 믿음이 가진 않지만 그래도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요리에도 사용하고 음료를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그 기분이 매우 흡족해서 앞으로 내 남은 삶은 우리집 살림에 비중이 커지는 남편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비록 배탈이 날지라도……. 첫 발효액을 시음 하던날 나는 실제 배탈이 났었다. 맛은 아주 좋았었는데 말이지…….(202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