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제자리로>, 최정화 소설 감상평(2019 읽고 씀)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러우며, 손톱을 바싹 깎아 끝이 뭉툭한 손이었다. 내 손보다 삼 센티미터 정도는 더 길었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 역시 내 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내 손이 놓여 있어야 할 자리에 잘못 놓인 다른 사람의 손이었다. 그것은 어떤 남자의 손이었다.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몰랐지만 그 남자의 손은 내 손목에 붙은 채로 분명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최정화, 모든것을 제자리에>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나는 전보다 한결 자유로워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브래지어를 더 이상 착용하지 않아도 되었고 더 이상은 체모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으며 공공장소에서 생리대를 꺼내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았다. 피해를 당한 일에 자책감을 갖고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내 예민함 탓으로 돌렸던 불편함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용기도 얻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롭지 못했다. 내 안의 여성혐오가 튀어나올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여성인데도 여성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행위에 가담할 때가 있었다. 남성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재단하거나 내 성정체성과 위반되는 문화를 즐길 때가 있었다. 이 소설을 쓸 때 역시 비슷한 두려움을 느꼈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달고 소개될 이 소설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내가 나자신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오염된 일부가 발견될 것 같았다.
두려움을 이기고 단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로 이 소설을 썼다. 때로 남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남성의 목소리로 세상을 말하는 것에 더 익숙한 나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저 해방되로 싶다.<최정화 작가노트>
현재 나의 페미니즘의 정도를 말하라면 최정화작가와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할것 같습니다. 분명 주변의 남자들로 인해 상처도 많이 받았고 생물학적 젠더의 역할의 한계를 느끼며 분노를 느끼고 있는 지금이지만,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이중적 감정으로 인해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했습니다. 최정화 작가처럼 때로는 남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남성의 목소리로 세상을 말하는 나를 발견할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현남 오빠와 같은 남자친구를 가진 여자들이 부러울때가 있었으며 남편의 예쁜 소품처럼 살고 싶을때도 많았습니다. 사회에 대한 두려움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남편없으면 살지 못할것이라고 말을 하곤 합니다. 아마도 사회가 만들어놓은 의존적 성향일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핑계일 수 있습니다. 나의 천성일것입니다.
사회인으로서는 여자라서 힘들었지만 가정에선 여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저뿐만이 아닐것입니다. 여성운동이 사회에 진정성있는 울림을 주려면 여성스스로를 돌아봐야합니다.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자기를 되돌아 보지 않는 혁명은 남탓만 하는 비루하고 천박한 모습으로 보여지기 마련입니다. 스스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짚어나갈때 사회는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혁명을 이룰것입니다.
저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베어버린 습관적 생각들로 남성의 손을 가지게 된것같습니다. 최정화 작가가 표현한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몰랐지만 그 남자의 손은 내 손목에 붙은 채로 분명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여성으로서 정말 섬뜩할정도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남성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일침이 아닐까요? 저는 최정화작가의 글이 여성스스로를 뒤돌아 보게 하는 가장 교훈적인 페미니즘 소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여성은 여성스스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아야 할때입니다. 자주적 혁명이 아닌 의타적인 혁명은 의미와 가치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자주통일을 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처럼요,,,
Ps. 한가지 혐오표현은 더 많은 대항표현으로 극복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현남 오빠에게>이 책처럼 유쾌하고 재미있는 대항표현으로 맞선다면 페미니즘운동이 참으로 즐거운 운동이 될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또 스스로를 되돌아 보지 않고 여성운동을 여성혐오로 변질시키는 일부 왜 곡된 행동들을 하는 여성단체는 페미니즘 운동을 퇴보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