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서평
"우리와 다른 식으로 식사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야" 아줌마가 불쾌하다는 듯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처럼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식탁에서 무안을 줄 수는 없어. 저 앤 네 손님이고, 그러니 만약 그 애가 식탁보를 먹어 치우고 싶다고 해도 그냥 내버려 둬야해. 내말 알아듣겠어?"
"아줌마, 저 앤 손님이 아니에요. 그저 커닝햄 집——"
"입 닥치지 못하겠어! 그 애가 누구건 상관없어. 일단 이 집에 발을 들여놓았으면 누구든 다 손님인 거야. 한 번만 더 잘난 체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어디 입방아를 놀려 봐! 너희 집 사람들이 망신 주는 걸 보면 그 잘났다는 것도 별 볼일 없는 거야. 식탁에서 그런 식으로 굴려면 차라리 여기 부엌에 앉아 먹어!” (55)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이런 타자에 대한 모든것을 배려해야 한다는 뜻일것이다. 나와 다른 성격을,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을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 이 책은 1960년에 출간되었다. 가정에서 타자에 대한 이러한 배려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우리는 지금도 예의와 예절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나와 다른 타자를 재단질 하고 있지 않은가.
“고개를 높이 들고 주먹을 내려놓는 거다. 누가 뭐래도 화내지 않도록 해라. 어디 한번 머리로써 싸우도록 해봐……. 배우기 쉽지 않겠지만 그건 좋은 일이란다.” (148)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174)
“그들에겐 분명 그렇게 생각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 줘야 해.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200)
“그래, 훌륭한 귀부인이셨어. 할머니는 세상일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계셨지. 내 생각과는 아주 다른 생각을……. 아들아, 네가 그때 만약 이성을 잃지 않았어도 난 너에게 할머니께 책을 읽어 드리도록 시켰을 거다. 네가 할머니에 대해 뭔가 배우기를 원했거든.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겨우 45킬로그램도 안되는 몸 무게로 할머니는 승리하신 거야. 할머니의 생각대로 그 어떤 것, 그 어떤 사람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돌아가셨으니까. 할머니는 내가 여태껏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용기 있는 분이셨단다.”(213)
“그 사람은 어느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해야 하고, 그 대상이 그 집에 가득한 애들보다는 차라리 내가 되는 편이 낫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404)
“그런 범죄가 옳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강간을 사형시킬 만한 범죄로 보면 안 될지도…….”(406)
감상평.
책을 읽으며 공감의 감정은 느꼈어도 누구를 닮아 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내가 극중 인물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바로 화자(진 루이즈 핀치)의 아버지 에티커스 핀치 변호사이자 메이콤 군 의회 의원이다.
에티커스의 마음을 따라가다보면 내마음도 넓어질것만 같다. 내마음도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가 될것만 같다. 에티커스는 편견의 사회, 불균형의 사회, 분노의 사회에서 내가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야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화가 많은 사람에게 또는 내 마음의 평화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에티커스가 길을 알려줄것이기 때문이다.
이책은 에티커스 핀치의 두 남매 젬과 스카웃이 메이콤 마을에서 펼치는 사랑스러운 성장 소설이다. 작가 하퍼리는 말괄량이 스카웃의 화법으로 남매의 사랑스럽고 재미있는 유년시절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유년시절이 이야기는 남매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아빠 에티커스의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따뚯하고 포용의 인성이 뒷받침하고 있다. 두 남매는 이런 아빠를 한없이 존경하며 신뢰하고 사랑한다.
이야기는 두 가지 큰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사건은 사람들이 무고한 타인에게 어떻게 편견을 만들어가는 가를 잘 볼수 있다. 그 편견의 희생타는 남매의 이웃에 사는 <부 래들리>이고 또 한사람은 흑인 <톰 로빈슨>이다. 그리고 그 왜곡된 편견이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젬과 스카웃은 마을에 떠도는 소문을 믿고 은둔생활을 하는 이웃집 부 래들리를 공포의 인물로 형상화해간다. 그리고 톰 로빈슨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백인들의 우월주의의 희생양으로 결국 강간범으로 형집행이 되어 감옥에서 도주하다가 총살된다. 대낮에 담을 넘는 탈영은 자살행위와 다름없다. 에티커스는 흑인 톰 로빈슨의 백인 여성 강간 오명을 벗기기 위해 변호를 맡았고 톰 로빈슨이 범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들로 변호를 했지만 백인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마음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가 이 사건으로 알수 있는 것은 진실과 정의는 공정과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배심원의 사회적 입장과 관계가 있을뿐 진실은 개개인의 이해관계 즉 이기심의 건너편에 존재한다. 이를 볼때 우리 사회에서 과연 누가 정의로울 수 있고 누가 악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작품에는 소위 ‘~카더라’가 존재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근거없는 타인에 대한 소문들이 무성하다. 성공회 등 여성들의 친목 모임에서 탄생되는 비화들.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지루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 소문들은 살해 성을 띄고 무기가 되어 편견을 만들고 나와 다름을 부정하고 살해하는 사회인식을 만들기도 한다.
얼마전 고인이 된 이선균씨가 안타깝다. 누가 그를 죽게 만들었는가. 검증되지 않는 루머들을 누가 퍼트리고 악의적으로 이용했는가. 설령, 그가 죄를 지었다해도 우리는 그를 말과 인식으로 살해할 자격이 있는가.
그런데 에티커스는 자신을 향한 이 무자비한 혐오의 말들을 견뎌내는(?) 내공의 힘이 있다. 나는 에티커스의 따뜻한 인품을 닮고 싶기도 하지만 요동하지 않는 이 내적 힘을 닮고 싶은 것이다. 유얼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그는 그냥 손수건으로 닦고 지나칠수 있다. 상상만 해도 멋있는 그의 기품이라니… (나도 얼마 전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준 사람을 참아낸 사람을 보았다. 정말 멋있어 보였다.)
“그 사람은 어느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해야 하고, 그 대상이 그 집에 가득한 애들보다는 차라리 내가 되는 편이 낫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404)
차라리 그 대상이 내가 되는 것이 낫다는 말. 에티커스만이 할 수 있는 언어라고 생각했다. 나도 남은 인생은 화내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포용의 사람, 관용의 사람으로 살고 싶을 뿐. 그런데 오늘도 나는 화가 났다. 그래도 난 정말 노력하는 사람이 될것이다.^^
ps. 고전의 한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 책은 사람의 인권과 평등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현대 여성이 현시대의 기준을 본다면 여성들이 싫어할만한 의식들이 몇군데 존재한다. 특히 에티커스가 배심원의 자리에 여성을 등용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성은 질문이 많고 말이 많아서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나온다. 에티커스는 인종 차별주의에 저항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적인 인물로 나오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그리 앞서가지 못한 인식으로 비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