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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Oct 14. 2022

설거지 해방일지

아침 일찍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사부작사부작’ 거리는 소리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도 이어 들려왔다. 남편은 또 산에 가나보다. 나는 내 컨디션에 맞춰 조금 더 이불 속에서 머물다가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적막이 흐른다. 라디오를 켠다. 자기 주파수를 찾기 위해 ‘지지지지직’ 애쓰는 소음이 되려 나를 안정되게 한다. 물을 마시려고 주방에 들어섰는데 낯선 상황을 발견. 어젯밤 쌓아 둔 설거지가 깨끗이 되어 있었다. 내가 바쁘고 몸이 좋지 않을 때에도 아무도 알아서 대신해 주지 않았던 설거지가 오늘은 말끔히 처리되어 있었다. 부탁도 잔소리도 없이 남편이 ‘알아서’ 설거지를 하고 외출을 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우리 집 주방 시스템을 바꾸면서 시작되었다.


 집안의 사물의 질서에 무감각한 이 남자는 청소와 무관한 사람이다. 그러니 설거지를 알아서 해 줄 남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어쩌다 나도 설거지가 지겨워 설거지 좀 해달라고 퉁명스럽게 말을 하면 이 남자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어도 싱크대가 너무 낮아 허리가 아파서 못 하는 거야.”라는 말이었다.


남편의 신장은 186cm. 두 아들은 182cm. 16년 전 이사 오면서 설치한 싱크대는 160cm도 안 되는 내 키에 맞춰져 있어 당연 불편했을 것이다. 남편이 허리디스크도 있어 나조차도 설거지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한다고 여겼다. 설거지 뿐 아니라 대부분 쪼그리고 하는 집안일 또한 모두 내 차지였다. 이런 현실에 대한 부담이 있었던지 어쩌다 가득 쌓아 둔 설거지가 하루를 지나고 그대로일 때엔 설거지 악몽을 꾸는 날도 있었다. 나의 게으름을 책망하는 재촉이 돌덩이처럼 내 가슴을 짓누르는 꿈.



이런 우리 집이 16년 된 낡은 싱크대를 교체하게 되었다. 싱크대 교체의 과정은 가장 먼저 주방의 구조와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즉 주방의 레이아웃을 정하면 현장 실측을 하고 싱크대 품격(레벨)을 정해야 한다. 당연 돈을 많이 투자할수록 가구의 품격은 높아진다. 우리 집은 가장 기본라인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전체적인 방향을 잡고 나면 상판, 싱크볼, 수전, 액세서리, 조명 등 세부적인 것들을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가장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싱크대의 높이이다. 보통 싱크대 하부장의 목대 사이즈는 표준 사이즈로 고정되어 있고 목대의 다릿발로 사용자의 신장을 고려하여 싱크대 전체 높이를 조절하게 된다. 우리 집의 싱크대의 높이는 920mm로 정했다. 보통 건설회사 싱크대 규정 사이즈가 860mm 정도라고 하니 우리 집은 표준 수치보다 5센티 이상이 더 높은 것이다. 내가 사용하기에는 다소 높은 듯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싱크대 높이를 신장이 큰 남편과 두 아들에게 맞추기로 했다. 싱크대 높이를 나한테 맞춘다는 것은 주방일을 나만의 역할로 나 스스로가 인정한다는 것 아닌가. 앞으로의 삶에서도 설거지가 나의 특권처럼 되는 것은 정말 미친 짓이다.


싱크대를 높이고 나서 처음 설거지를 하는데 내 어깨와 등이 아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잘못한 선택인가? 잠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한 달 정도 사용해 본 결과 별 불편함은 없었다. 내가 롱다리여서 그런가? 다른 집들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궁금해져 N포털을 검색해 보았다. 사람들의 신장이 커짐에 따라 2021년부터 평균 싱크대 표준 높이가 890으로 변경되었다 한다. 그에 따라 요즘은 싱크대 높이를 900으로 하는 추세라고. 우리 집의 싱크대 높이가 평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치라는 것을 알게 되자 괜히 내 마음이 더 놓였다. 남편은 내 신장에 맞춰진 싱크대에 자신을 맞출 수 없었지만 나는 얼마든지 맞출 수 있었다. 내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일인데, ‘Of course!’


결과적으로 남편의 신장에 싱크대를 맞춘 것은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나는 이제 너무도 편하게 ‘오늘은 자기가 설거지 좀 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허리가 아파서’라는 남편의 궁색한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밤새 쌓인 설거지를 스스로 하는 남편을 보게 되었다. 이제 설거지를 하는 일은 남편보다 내게 더 불편한 일이 되었다. 앞으로는 우리 집 주방 일은 내가 아닌 세 남자가 도맡아서 하게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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