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헬로해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헬로해피 Oct 14. 2022

시스템의 중요함

시스템의 중요함


나 : 내 가사 근무환경은 너무 열악해. 그러니 일하기가 더 힘든 것 같아!

남편 :  대신 임금을 많이 주잖아?

나 : 무슨~~ 무임금 가사 노동이지! 그리고 임금이 많은 곳은 근무환경도 복지도 더 좋더라! 근무환경이 나쁘니까 청소가 두 배로 힘들어. 수납 기능이 좋고 새집이면 청소하기도 편할 텐데 이래서 근무환경 근무환경 하는구나!

아침 일찍 호수공원을 한 바퀴 휘리릭 돌고 청소를 했다. 둘째 침대 이불보와 침대시트를 산뜻하게 갈고 물걸레를 들고 무릎을 꿇어 방바닥을 닦는다. 화장실 타일과 변기를 박박 닦고 어젯밤에 야식을 먹고 쌓아둔 설거지를 한다. 낡은 가스레인지는 왜 20년이 다 가도록 고장도 나지 않아서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는 건지 야속할 뿐이다. 주방에서 가스렌지 관리만큼 성가신것도 없다. 싱크대와 세트로 설치된 수납장은 점점 주저앉아 자칫 일어날 대형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야구방망이로 받쳐두었다. 이 야구방망이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은 군 복무 중인 둘째가 고등학교때 들고 온 친구의 것이다. 둘째의 친구에게 돌려줘야 할 야구방망이가 지금까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둘째의 친구는 자기 야구방망이가 낡은 우리 집 싱크대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나 : 아니… 너희들은 똑같은 걸로 20년 넘게 잔소리를 하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니? 신었던 양말 아무 데나 두지 말고 베란다 세탁바구니에 넣어 달라고!

또 나 : 아니… 화장실 청소, 내가 다 하잖아……. 그러면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눌 수는 없는 거야?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요즘 부쩍 내 잔소리가 더(!) 늘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잔소리는 잔소리 일 뿐이다. 한쪽 귀로 듣고 뇌를 거쳐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쪽 귀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번 똑같은 문제로 화가 나고 이렇게 잔소리를 쏟아낼 수 있는 것일까. 혼자 스트레스를 받다가 체념을 하던 끝에 생각 하나가 스쳤다.

 ‘그래 이건 시스템의 문제구나.’

아들들의 방 구조는 청소에 미숙하고 저능한 남자 사람들이 손쉽게 정리정돈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불편해 보였다. 내가 가사 노동에 스트레스가 심화된 것은 우리 집의 구조적 문제의 비중이 클터이다. 수납이 좋고 동선이 좋은 주방이 있다면 설거지와 요리가 이렇게 짜증스럽지 않을 터. 수납 공간이 넉넉하다면 남편이 구석구석 빈틈 마다 물건을 쑤셔 넣지 않아도 될 터. 가사 노동은 좋은 시스템을 갖출 수 없는 자에게 더 가혹한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된 바, 나는 급기야 비용 문제와 결단력 부족으로 미루고 있었던 집수리를 밀어붙였다. 그렇게 집을 수리하고 집안을 새롭게 정리를 하면서 우리 집안의 많은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었다.

먼저 남편에게 벌어진 일을 말해보자. 싱크대 교체를 하면서 싱크대 높이를 남편 신장에 맞춰 시공했다. 지금은 남편이 늠름한 뒤태를 보이며 설거지를 아주 가끔 하고 있으며 ‘허리가 아파서…’라는 궁색한 변명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큰 아들 방에서 벌어진 일을 말해보자. 일단 아들이 옷걸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옷걸이 위치를 바꾸어 주었다. 대신 침대가 창가로 밀려나고 옷걸이와 서랍장이 방에서 가장 따뜻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과거엔 아들의 건강이 가장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는 내 정신 건강이 더 걱정이 되어 할 수 있었던 일이다. 또한 아들이 신은 양말이나 빨랫감을 베란다에 있는 세탁바구니까지 내어놓지 못하는(우리집이 31.5평 초대형 아파트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들 방에 친절히 세탁바구니도 따로 마련해 주었다. 그랬더니 아들도 신던 양말과 빨랫감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물론 여전히 바구니 밖에서 뒹구는 옷들이 보이고 옷을 옷걸이에 거는 것은 아직도 잘 되지 않지만 아들에게 좋은 시스템은 내게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롭게 구조를 바꾼 아들 방은 내가 청소하는 데 있어서도 훨씬 편리해졌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일상의 불편 사항을 바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세 남자들의 편의보다 나의 편의만 고려했던 것이다. 그들이 옷걸이가 불편해서 옷을 걸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물건들을 잘 정리할 수 있는 수납 공간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그런 친절함이 없었던 것이다. ‘진작에 집안일에 미숙한 남자들이 집안일을 잘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편리한 환경을 만들어 줬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동안 나는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었구나’라는 자기반성도 잊지 않았다. 잦은 잔소리에도 끄덕 않고 바뀌지 않는 우리가족이 나를 이렇게 착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자가 혼자여행이라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