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여행의 참맛
2년 전부터 친구 셋과 여행비를 함께 모았다. 통장에 돈이 점점 불어나자 하루빨리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얼른 여행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작년까지는 멤버 3명 중 나를 포함한 2명이 일을 하고 있어서 여행을 보류하는 것이 덜 미안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직장을 다니던 친구가 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팬데믹이 해제가 되었으니 사람들도 서둘러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돈은 충분히 있겠다 이제는 내 시간만 허락된다면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행에 있어 오직 나만이 걸림돌이 된 기분이 들어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나도 어디든 떠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돌봄 노동자인 나는 장기 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다. 내가 케어하는 J의 부모가 모두 직장인 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을 쉬려면 J를 돌볼 대체 인력을 구해 놓는 것이 먼저다. 그런 복잡한 과정이 싫고 두려워서 나의 개인적인 사정에 의한 휴가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나에게 장기 휴가가 생겼다. 그것도 4월의 푸릇한 날에 말이다. J네 가족이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6박 7일 베트남 다낭으로. 그러므로 나에게도 휴가가 생겼다. 나는 이 귀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남편과 여행을 할까 고민했지만 나는 친구들과의 여행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결혼 후 친구들과는 난생처음 떠나는 여행이라 머뭇거려졌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는 언제고 함께 여행을 떠나야 할 여행 운명 공동체가 되지 않았던가.(셋이서 여행 자금을 자그마치 1천만 원 가까이 모으게 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첫 경험을 해치우고 싶었다. 그 편안하고 느슨한 가족이 아닌 낯선 이들과 며칠을 함께 보내야 하는 긴장되고 복잡한 마음의 첫 경험을 하루 빨리 털어버리고 싶었다.
나는 이번의 휴가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내 휴가가 한 달 남짓으로 바짝 다가왔다. 급한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휴가 제안을 했다. 의도치 않게 4월에 휴가가 생겼으니 함께 여행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모두들 매우 기뻐했다. 나는 너무 늦게 말을 꺼낸 것 같아 미안했다. 내가 이른 결정을 했다면 여유 있게 더 많은 여행의 정보를 탐색할 수 있을 터인데, 남편과의 여행을 고민하느라 늦게 제안한 것이다.
우리의 여행공동체는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함께 해온 관계이다. 우리 세 사람은 개성이 넘치고 예민한 사람들이다.(내가 제일 그런편?) 그러나 많은 토론의 과정에서 서로의 성향을 바로 파악하고 알게 된 관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만큼만 다가선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너무 내밀한 관계보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선호한다. 많은 토론의 시간은 그렇게 우리에게 알맞은 한계선을 자연스럽게 그어주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세 사람의 만남은 가장 배려 있고 선한 만남이 될 수 있었다. 아마도 까다로운 만큼 관계에 대한 사유가 깊었던 탓이라. 내가 그러했으므로. 그 많은 사유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예민함을 극복하고 관계의 지혜를 장착한 사람들인 것이다. 서로의 스타일을 알아채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는 존중과 배려는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인 것이다. 이 방식은 요즘 젊은이들이 연애하는 방식이라고들 한다. 어른의 세계에선 다소 차가 워보일 수 있지만 깔끔한 이 방식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한 온기를 느끼게 된다. 타자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배려의 에티튜드(attitude). 얼마나 세련되고 멋진 일인가? 까칠함이 가져다준 관계가 더 좋은 관계를 지향하고 훌륭할 수 있다는 것,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 우리가 드디어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패키지 여행으로 결정했다. 첫 여행이니 만큼 패키지여행이 가장 무난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해본 사람들의 조언을 듣자니 그 며칠의 여행 후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일정마다 무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이 갈리는 사소한 일들이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지. 매번 선택과 결정은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상태에서 예측하지 못한 채 발생되는 일들에 초연해질 수 있는 심성이 어디 쉬운 일일까?(가족 여행을 몇 번 해보니까 알겠더라는. 식구인 우리 가족도 식성과 취향의 충돌이 적잖게 있었다.)
패키지 여행은 미리 계획된 여행 코스를 알 수 있으므로 서로의 개인적 취향을 고려하여 일정을 미리 조율할 수 있고 예측되는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미리 내 마음을 예측하고 상황에 따른 정신과 물질적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패키지 여행의 커다란 장점인 것이다. 물론 개인 취향이 서로 엇갈리면 여행지와 여행 코스의 선택부터 고난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행히도 취향이 비슷했다. 어쩌면 이 비슷한 취향이 우리를 여행의 동반자로 엮어준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단 하루이틀의 수고로 대만 여행을 결정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결정전 수많은 여행 정보를 제각각 알아보았다. 처음엔 인터넷 사이트에서 여행 상품을 공동구매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보를 알아보면 볼수록 혼란이 가중이 되었다. 정보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현타가 왔다. 어떤 것이 좋은지 도대체 결정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각자 알아본 정보를 공유하고 최종 결정을 위해 미팅을 가졌다. 결국 우리가 만나 선택한 것은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근처 여행사를 찾았고 그 자리에서 예약을 해버렸다. 여행지는 처음 알아본 태국 치앙마이에서 대만으로 바꾸었다. 상담자의 추천과 설명을 들으니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역시 우리에겐 아날로그 방식이 맞는구나 싶었다. 시스템에 적힌 정보를 사람이 설명해 주는 방식, 아직까지는 사람의 도움이 편한 우리였다.
그렇게 우리는 몇 번의 카톡과 한 번의 만남으로 여행지를 정했다. 사소한 개인의 생각은 우리의 공동의 목표를 위해 ‘배려’라는 아름다운 언어에 포함시켰다. 물론 서로가 감당할 만큼에 한해서다. 그리고는 한 달을 세상 편안하게 기다렸다가 여행비 입금할 때 한 번, 환전과 공항버스를 함께 탈 장소를 정하기 위해 한 번의 단톡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비교적 너무도 간단하게 여행계획을 세웠다. 다 차려진 밥상을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이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나는 이번 패키지 여행을 통해서 누군가의 챙김을 받는다 것이 이렇게 달콤한 것인지 처음 느껴보았다. 늘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내가 원하는 속도로, 자유여행을 꿈꿨지만 정작 그 자유라는 이름이 나를 더 구속하고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말이다.
3박 4일 동안 엄마와 아내인 우리는 가족의 밥을 챙기지 않아도 되었고 청소, 빨래 등 집안일에서 멀어져서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깨끗한 침대와 청소 제공은 물론이고, 모닝콜이 우리를 깨워주었고 ‘삼시 세끼’가 제공되었고 여행 내내 대만 최고의 명소에 데려다주었다. 이 편안함을 생각하면 낯선 이들과 함께 하는 며칠쯤은 전혀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디를 갈까 무엇을 먹을까 선택의 기로에 서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매우 만족해했다. 오로지 즐기기만 하면 되는 3박 4일 여행이 너무 달콤했다. 새로운 풍경아래서 행복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되었다.
우리에게 이 패키지 여행은 곧 자유를 뜻했다. 첫날에 역하게 느껴졌던 대만의 낯선 향도 하루가 다르게 적응이 되어갔다.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식사와 호텔의 퀄리티가 조금 떨어지면 어떠하리. 날씨도 잘 따라 주었다. 우기에 접어들어 비가 자주 오는 대만 날씨라더니 야외투어 중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호텔도 식사도 이만하면 훌륭했다. 설혹 그렇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여행 중의 모든 악조건도 달고 재미있게 느꼈을 것이다. 이미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행복에 대한 성숙한 마음의 각오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이번 패키지 여행에서의 우리의 행복은 아무 사고 없이 스트레스 없이 우리의 시간을 편안하게 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하는 데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여행 마지막날이 너무 빨리 돌아왔다. 엄마이고 아내인 우리가 현실의 가족돌봄 세계를 잊고 온전히 나만을 위해 며칠을 살아보는 것, ‘패키지의 참맛’이라 생각된다. 여행 중 친구는 대만의 향이 가득 한 밥을 먹을 때마다 습관처럼 말을 했다. “나는 남이 해주는 밥이 가장 맛있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