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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May 11. 2023

결혼, 이제야 보이는 것들

결혼, 이제야 보이는 것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늘려 이사를 하고 아이들 교육에 힘쓰고 대출금 갚느라 자존심 던져 가며 돈을 벌고…….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내게 주어진 삶을 허겁지겁 살았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삶을 살 것인지의 삶의 고민 따위는 없었고 현실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이런 내 처지에 남편과 내가 어떤 점이 비슷하고 다른지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다. 

결혼이란 생활습관, 가치관, 가정환경까지 모든 것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당연히 어떻게 서로 맞춰가야 할지 고민부터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임에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렸던 나에겐 서로의 취향이나 가치관에 대해 생각해 볼 지혜가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윤택하게 별 탈없이 잘 사는 것이 중요했다. 정말 바보 같지만 현재보다 미래가 중요한 나였다.

우리 부부가 우리의 관계에 집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은 우리의 성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환경적인 요인이 크다. 과거에 얽매어 있어도 현재의 문제를 볼 수 없지만 미래로 향하는 삶도 현재를 볼 수 없다. 오로지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불안함에 대한 압박이 없어야 가능하다. 나는 결혼으로 과거는 정리되는 동시에 미래를 향한 비상을 꿈꿨다. 그 비상의 꿈이 ‘평화가 될 것이냐 압박이 될 것이냐’를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현재에 집중하는 삶이 아니었다.

결혼은 새로운 시작이다. 시작이 늘 희망차 듯 나의 결혼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찼다. 과거를 떠나 우리의 미래를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그리는 것, 희망찬 미래, 내게 결혼의 의미는 그랬다. 결혼이 과거의 내 고통들을 다 지우고 희망찬 미래만 데려온 것 같았다. 딱 아이들의 유아기까지 그런 달콤함에 취해 살았던 것 같다. 나의 분신인 내 아기들을 물고 빨고 육아에 전념하던 그때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달콤해도 문제의 실체는 왜곡된다. 흰 눈 같은 설탕은 온 대지를 다 덮고도 남는 허용의 미덕이 수백만 톤 생산되어 모든 쓴맛을 모두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달콤함은 잠시, 이후로 우리의 결혼 생활은 많은 충돌을 일으켰고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의 간극을 알아채지 못했다. 혹은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우리의 신혼이 희망이라는 설탕으로 모든 문제들이 덮어졌다면 이후로는 사는데 급급해서 우리의 문제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충돌되는 지점에 화가 났고 며칠 지나면 또 미래를 향해 살아가야 하는 삶 속에 묻혀버리는……. 지금 생각하니 우리는 그런 껍데기 속 삶을 반복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해결하지 않고 덮인 문제는 여전히 설탕 아래에 남게 된다. 설탕이 녹으면 실체의 윤곽이 드러난다. 거기에 불순물이 들어가 잘못 산화되면 발효청이 되지 못하고 유해한 곰팡이를 피우게 된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 못하고 방치된 오래된 김치가 곰삭은 맛을 내듯 유익한 균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겐 그 곰팡이가 우리 부부의 관계처럼 보였다. 곰삭은 것들에는 유익한 곰팡이도 있고 유해한 곰팡이도 있듯이 무딤 속에 내버려진 우리의 곰삭은 삶이 그랬다. 유익하기도 하고 유해한 것들의 연속성이 지금 우리 부부의 모습처럼 보였다.

우리의 삶 중 유익한 것이라면 충돌의 지점들이 있을 때마다 민감하게 문제를 키우지 않았던 경우다. 남편의 무던한 성격 탓에, 나의 부족한 용기덕에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가족 공동체로서 연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유해한 것은 남편의 생활습관이나 가치관의 문제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버려둬서는 안되었던 생활습관들! 지금 생각하니 남편의 생활습관은 분명!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일상이 고단한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순전히 이것은 내 입장에서 그리는 문제점일 뿐이다. 남편은 남편의 입장이 따로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편도 나 때문에 일상생활에 힘든 점이 있을 것이다.

여하튼, 내 삶의 발자취를 들여다볼 수 있을 여유로운 나이가 되자 남편과 나의 생활습관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예전엔 생존의 삶에 급급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나는 출혈이 좀 크더라도 현 생활의 불편함을 해소시키기 위해 좀 더 효율적인 가구도 사고 집수리도 하고 싶은데 남편은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다. 물론 옷장 정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나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나는 항상 정리정돈이 된 집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편인데 남편은 무감각한 편이다. 청소기는 구입할 때 한번 시험 삼아 돌리는 것이 전부이고 화장실 배수구에 쌓인 머리카락을 치우는 일은 물론이고 화장실 청소는 이제껏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청소는 그렇다 해도……. 막상 침대시트와 이불을 깨끗하게 교체해 놓으면 엄청 편안한 모습으로 주무시면서……. 이곳에서 우리의 프라이빗한 사생활은 다 논할 수 없으니 이 정도로 하고. 암튼 알고 보니 남편과 나의 생활습관이나 생각해 온 방식들은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른 체 26년을 살아왔다는 것이 참 신기할 뿐이다.

보통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오랜 세월 같이 살다 보면 상대방의 문제점들에 일종의 포기 선언으로 점차 순둥순둥 넘어가게 된다고 한다. 나도 한동안 그랬던 것 같다. 서로가 다른 점들에 대해선 회피하려 했다. 회피, 어느경우엔 아주 편안한 방법이 되기도 하다. 그렇게 두 아들들이 잠시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일종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편안해진 듯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내가 그동안 소홀했던 집안 살림에 다시 집중하면서 심화된 갈등이었다. 우리 집은 이사 온 지 16년이 된 구축 아파트인지라, 신혼가구 그대로 사용하고 있던 지라, 수납공간 부족으로 집안의 질서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동안 계획성 없이 늘어난 살림살이도 무질서했다. 정리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무질서가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나는 이 상황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본격적으로 집안정비에 나섰다.

그런데 집안을 청소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한 사람. 고민하는 사람도 오로지 나. 그러므로 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우리 집안에서의 생활의 규칙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우리의 무질서한 집은 나 만큼이나 남성 3인조에게도 불편할 것인데 그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았다. 내가 불편을 호소하자 “힘들면 그냥 너도 치우지 말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오로지 나만 안절부절 불편했다. 잔소리든 충돌이든 한번 겪은 일은 다음에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남편과 아들의 생활습관은 변함없이, 여전히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남편의 입장에서는 자신은 예전에도 지금도 같은 모습인데 나의 태도가 변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결혼 생활 내내 가사는 당연 내 일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체력의 한계도 느끼고 나도 평생 해온 지루한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라면 좀 더 효율적인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실제로 주방 인테리어를 해보니 주방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크게 줄었다. 변화를 바란다면 잘된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사유가 달라졌다. 현재의 삶을 살고 싶었다.  

“우리가 함께 사는 우리 집의 일인데 집안일을 도맡는 내게 최소한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내가 불편해하는 것들에 적극 협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가구도 바꾸고 집수리도 하고!”

최근에도 이런 쳇바퀴 도는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나 남편은 전과 달리 집안일에 비교적 협조적이고 내 의견을 수긍해주고 있지만 아직도 어렵다. 그러고 보면 우리 부부는 신혼 때부터 똑같은 문제로 반복되는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다툼의 원인을 인식하여 제거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흘러온 것이다. 삶의 더 중요한 갈등과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서로의 생활습관이나 성격차이를 분석해 볼 만한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다툼이 생기면 며칠 속상해하다가 아무 일 없단 듯이 일상으로 회복되는 그런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니 갈등은 있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동거인의 생활습관이 내 삶의 질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깨닫고 있다. 각성된 내가 문제인 것인지 남편의 생활습관이 문제인 것인지 내 입장으로서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래서 친한 지인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다. 두 친구 모두 나의 예민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냥 샘도 치우지 마! 그냥 못 본 척 해.”가 돌아온 대답이었다. 정말 내가 문제인 것일까?

하지만 내가 살아온 방식대로 결론을 내리자면, 나의 예민이 현재의 남편을 아주 발전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내 기준에서 말이다. 나는 삼식이를 돌보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되고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인 내 능력으로는 절대 해드릴 수 없는 쑥개떡을 드시게 된 것이다. 내가 만약 현모양처가 되었다면 내 남편은 살림과 먼, 혹은 살림은 여자나 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여전히 살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어쩌면 나의 예민이 가사노동의 변혁에 있어 혁명적 전사의 면모가 아닐까?

세상을 바꾸는 것은 무딘 사람이 아니라 어떤 현상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페미니즘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 사회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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