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 back home
설 연휴 시작이다. 나는 오늘 만을 기다렸다. 겨울 방학을 맞아 돌봄 노동자로서 많이 꽉 찬 일정을 살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느라 밖에서의 시간이 많아지니 여유로운 집콕 생활이 그리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기 바빴다. 커피 한잔의 여유는 사치에 불과했고 퇴근하면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던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많이 기다렸다. 오늘의 설 연휴를. 아무 일정 없는 오늘이 소박하게 행복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피곤도 잊을 가뿐한 마음으로.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을 노루궁뎅이 찻물로 삼키고 사과와 크랜베리를 그릭 요구르트에 섞어 섭취했다. J의 수업용(숟가락질)으로 사두었던 '인디안 밥' 과자도 섞어먹었다. 가공된 맛은 역시 국룰이고 최고다. 사과도 한 알 먹었다. 사과는 베이킹소다에 뽀득하게 씻었다. 껍질에 영양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상식을 몸소 실천하기로 마음먹었기에. 그러나 접시에 담긴 사과를 먹고 있을 때야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껍질을 말끔하게 깐 사과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평소 습관이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며 설 연휴 첫 아침을 맞이했다.
커피도 내렸다. 바쁘고 피곤한 생활로 커피를 마시는 것도 5일 만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피곤한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5일 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내 컨디션은 정상이었다. 내 피곤과 커피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는 사실과 한 잔의 커피는 삶의 여유를 잠시 누릴 수 있는 일상의 특권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 나는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멀리 떠나 있었던 것도 아닌데 먼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집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이 없어서 일까? 몇 주째 여행을 떠났다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이 기분이 신기했다. 남편은 점심을 먹고 나면 출근을 할 것이다. 이 사실이 나를 더 기쁘게 만든다. 우훗!
나는 왜 이토록 빈 둥지에 홀로 남겨진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나. 혼자서도 충분히 재미있기때문이다. 오늘도 아침 일찍 노트북을 열고 삼류 글짓기를 하고 있다. '나는 정말 우리집으로 돌아왔구나.' 생각한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래도 설날인데…. 애들이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예전엔 섭섭한 기분이 들었는데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 둘째가 사느라 바빠서 그렇다고 말한 뒤로 너무 짠해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것들에 상처를 받는다면 나 답지 않은 일이니까. 어차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연락하면 되는 일이다. 사랑의 저울은 그런 것 아니겠나. 우리 수 사자들의 엄마는 그렇게 이해를 해야 한다.
어젯밤부터 전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우리 아들들은 호주와 아일랜드 달력에 맞춰 살고 있겠지. 그래도 한국은 설 연휴 덕담이라도 한마디 보태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아들들~ 우리 남편~ 우리 가족~ 앞으로의 모든 날을 축복해~~ 전화를 아무도 못 받네? 일 하느라, 공부 하느라 바쁘지?”
첫째는 얼마 전부터 알바를 시작했다 한다. 아일랜드는 학생 비자로 주 20시간을 일을 할 수 있다. 첫째가 잘 적응만 해준다면 앞으로 자신의 생활비는 문제없게 된다. 우리의 시나리오 대로 흘러가는 우리 가족의 삶이 너무도 감사할 뿐이다. 유로가 치솟는 것은 슬프지만. 이것도 어느정도 예상 한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정말 삶은 노력하는 자를 거스르지 않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톡을 보냈지만 아무 대답이 없는 우리의 수 사자들…….
“왜 아무도 대답이 없느냐…. 전화들도 안 받고?”
비로소 둘째가 대답을 한다.
“일하고 있어요.”
첫째가 대답한다.
“어제 개강해서 학교 다녀왔어요.”
아마도 학교 마치고 알바를 갔나? 물음을 삼킨다.
집 떠나 있는 아들들이 한국과 다른 달력으로 살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집에 대한 향수로 오늘같은 날 외로움을 느끼진 않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건 나만의 착각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이 우리 집을 그리워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들들이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다고 보험처럼 든든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맞는 첫 명절이 하염없이 쓸쓸했다. 돌아갈 고향도 집도 없어져 버린 그 상실감이 나를 슬프게 했다. 거기다 대고 시아주머님의 한마디가 내 가슴을 쳤다.
“제수씨는 갈 데도 없는데 더 있다 가세요!”
“제게도 가야 할 친정이 있답니다. 언니네 가야 해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서둘러 시댁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슬펐다. 나는 돌아갈 고향도 집도 없다는 상실감에 외로웠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런 내가 이제는 두 아들을 품고 있고 그들이 의지할 집이 되었다. 나는 아들들에게 집이 되어 주고 싶다. 내가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성인이 된 아들들이 언제든 찾아와서 쉬어갈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집이 되고 싶다.
지금 사는 우리 집은 첫째가 초등학교 8살 때부터 살던 집이다. 첫째의 친구들은 하나둘씩 대부분이 떠났다. 친하게 지내던 여섯 가구 중 우리 집을 포함하여 두 가구만이 남아있다. 우리 아들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의 우리 동네가, 지금의 우리 집이 우리 아들들의 고향이요, 안식처가 되길 바란다. 언제든 돌아 올 따뜻하고 아늑한 둥지가 되길 원한다. 둥지를 잃어 돌아갈 곳이 없어 외로웠던 나의 상실감을 최대한 늦게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따뜻한 집이 되어 주고 싶다. "Come back home any time, My s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