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스며드는 밤
내게 스며드는 밤
수많은 무거운 밤들을 나와 함께 했다. 하루를 살아내느라 물을 마신 솜이불처럼 무거워진 마음을 가벼이 만들기 위해 애쓴 밤, 비 온 뒤 나무 냄새가 더욱 짙어진 아파트 앞 가로수 길을 헤드셋 우주를 머리 위에 쓰고 달리는 밤, 나의 과거를 나의 현재를 모든 나를 쓰는, 나를 마시며 나의 일부가 되는 그런 밤, 내게 스며드는 이 수많은 밤들을 지나 마침내 에고의 나와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더 소중하게 삼고 버려야 하는지 내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내게 스며드는 밤은 일종의 나를 위한 종교의식과 같은 것이다. 나로 인해 상처 입은 자들을 생각한다. 내가 받은 상처들을 생각한다. 마음의 무게를 재는 양팔 저울이 멈출 줄 모르고 계속 흔들린다. 내가 준 상처, 내가 받은 상처, 양팔 저울에 걸려 옥신각신 서로 다투며 중심을 잡지 못한다. 제3의 눈을 가진 나는 저울 위에서 방황하는 마음들을 모아 분홍색 재활용 봉투에 담는다. 부정한 마음으로 삐뚤어진 나를 비워 낸다. 체념을 가진 내가 된다. 더 가볍고 새로운 내가 된다. 체념은 포기와 다르다. 포기는 도중에 관두는 것이지만 체념은 깨달음에 의해 자신의 의지를 거두고 또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내 미래에 대한 책임 있는 결정권을 갖는 일이다. 밤의 의식은 나를 책임, 깨달음 같은 무거운 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어른이 되게 한다.
나는 어른이 되어 아침을 맞는다. 마침내 평정심, 평화 같은 긍정의 단어들이 내 것이 된다. 내게 스며드는 밤은 나를 객관화하는 필터와 같다. 나를 최대한 가볍게 만든다. 나는 날아드는 총알로부터 더 이상 나를 보호할 수 없는, 녹이 슬어 손끝만 닿아도 부서질 것 같은 낡고 무거운 갑옷을 벗고 풋풋한 빨랫비누 냄새가 배인 가볍고 순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체념하고 오늘 가능한 일들을 하기로 한다. 가령, 아침 의식처럼 치렀던 커피콩을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을 체념하고 맥심 블랙커피 한잔을 손쉽게 마시는 일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