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급장교 시절 우리 사단에는 '강백호'라고 불리는 선임이 있었다.
강백호는 일본의 유명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인데 그가 강백호라고 불리는 이유는 농구를 잘해서가 아니다.
그가 농구를 잘하는지는 둘째치고 농구하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심지어 그 선임은 다른 연대 사람으로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를 강백호라고 불렸다.
그가 강백호라고 불린 이유는 그가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빨간 머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백호처럼 완전 새빨간색은 아니고 주황색에 가까운 색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한눈에 띄는 색이었다.
이쯤 되면 군대를 나왔던 사람은 그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머리도 못 기르게 하는 군대에서 빨간색으로 염색을 한다면 아무리 너그러운 지휘관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기들과 처음 그를 봤을 때 그가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어 혹시 말년 중위라서 염색을 한 게 아닌가 라는 의혹도 제기했지만 아무리 말년 중위라도 그렇게 밝은 색으로 염색을 한다는 것은 군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는 머리색 때문에 어딜 가도 눈에 띄었고 보는 상관들마다 머리색 갖고 트집을 잡았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대대장님도 그를 보고 '머리색이 왜 그러냐'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 문제없이 군 복무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장기복무도 지원했다.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정말 특이하게(심지어 혼혈도 아니다) 선척적인 붉은 머리였고 그의 머리색은 그가 군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머리색이 다른 것은 군면제 사유가 아니다. 그의 머리색은 선천적이니 어쩔 수 없었고 모두가 납득했다.
나 역시 선천적인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선천적인 이유로 머리색이 다른 것이 허용된다면 염색도 허용되어야 하지 않나?"
군대에서는 검은색 새치염색이 아닌 이상 염색이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유는 모르겠다. 염색한 머리는 눈에 띄기 때문에 생존에 불리해서 전술적으로 허용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전투 시에 방탄헬멧을 쓰기 때문에 머리색이 무슨 색인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머리색이 눈에 띌 경우 표적이 되기 쉽다고 한다면 한국 전쟁 때 미군과 UN군은 어떻게 우리와 같이 작전을 했겠는가.
군인은 품위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지만 품위유지라는 것의 기준이 애매하고 염색이 품위유지에 어긋난다고 정의하기도 힘들다. 같은 논리라면 마찬가지로 품위유지 의무가 있는 공무원들도 염색을 하면 안 될 것이다. 뭔가 타당한 이유를 찾기 힘들다.
군대에서는 짧은 머리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염색을 하더라도 금방 잘라야 돼서 가성 비적인 면에서 떨어지긴 하지만 군대에서 염색을 허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군대는 염색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규정인지 그저 관습인지는 병사든 간부든 염색을 하고 나타난다면 조리돌림을 당한 뒤 상급자에 의해 머리를 밀릴 것이다.
염색의 일례로 들었지만 군대에서 염색을 허용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마 내가 현역이었어도 누군가 염색을 하고 나타난다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봤을 것이다.
아니, 군대 내에서의 시선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시선도 곱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염색을 하고 있는 군인을 보면 '군인이 군기가 빠져서...'라며 혀를 차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군대에서는 아직 명분이 부족한 규정이나 관습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트랜스젠더 군인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현역 복무 중 트랜스젠더 수술을 받은 부사관이 군 복무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고 거기에 대한 군의 판단은 심신장애 3급으로 현역 복무 부적합이라는 결론이다.
규정에 의한 것이라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군은 여성성이 강한 남성의 경우 성주체성 장애로 현역 복무 부적합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 썼던 만기 전역한 성소수자 병사에 대한 글에서도 나오듯이 숨기고 들어올 경우 관심병사로 관리하되 현역 복무는 할 수 있다.
또한 트랜스젠더 수술을 한다면 심신 장애로 판단해 면제가 된다. 병역법상 병사를 여군으로 받지 않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납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병사에 해당하는 것이지 간부들에게는 좀 다른 기준이 적용돼야 하지 않을까? 간부는 여성도 가능한 영역이니 말이다.
이에 군은 난소와 자궁이 있어야 여군으로 인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심신장애가 있어도 본인이 복무를 희망하는 경우 전역하지 않도록 예외조항이 있긴 하다. 이 조항도 원래 없던 조항이나 유방암으로 가슴을 제거한 뒤 전역을 처분을 받은 군인이 소송에 승소하면서 생겨난 조항이다. 하지만 이 예외조항에서도 고의로 상실한 경우는 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준들로 트랜스젠더는 간부든 병이든 군에 복무할 수 없다.
이러한 기사들을 보며 현역 시절 편제 대비 부족한 인력으로 늘 고생을 했지만 인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던 게 기억났다.
전역을 한지도 꽤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군대에서 염색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5년이 넘게 군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짧은 식견으로는 여전히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저 염색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가 단지 기성세대들이 '보기 안 좋아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