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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Mar 12. 2018

점프

군생활 이야기

 보통 야전부대에서는 위수지역이라는 것이 있다. 군인은 항상 비상시를 대비해야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경우 제한시간 안에 부대에 들어와 만전의 태세를 갖춰야 한다. 그래서 보통 1시간 이내 들어올 수 있도록 갈 수 있는 지역을 제한한다. 이를 이탈할 경우 위수지역 이탈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흔히 ‘점프’라는 은어로 부른다. 

사실 기혼자는 모르겠지만 미혼자들은 젊은 혈기에 이성친구도 만나고 친구도 만나고 싶은데 특정 지역에서만 만나야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상대방이 와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안 만나기에는 본인이 너무 아쉬울 것이다. 물론 휴가라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한 달 전에 미리 짜는 휴가랑 달리 약속이라는 게 한 달 전부터 미리 짜지는 게 아니다. 게다가 중요한 사유가 아니면 업무상이 이유로 휴가를 내고 싶은 날 못 낼 수도 있고 아예 못 낼 수도 있다. 그래서 젊은 간부들은 알게 모르게 많이 어기곤 한다. 하지만 잘못 걸릴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규율이다.      

최근 국방부가 위수지역 철폐를 발표하면서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용사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지 간부들은  여전히 위수지역이 존재한다. 사진출처: 한국농어민신문

우리 같은 경우 수도권에 있었지만 서울은 못 가고 행정구역상 부대가 있는 지역만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서울은 차가 막혀서 1시간 이내에 못 들어올 수도 있다는 당시 사단장의 판단으로 그렇게 설정되었지만 사실상 1시간 내에 들어올 수 있는 거리의 서울은 다들 그냥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사단장이 바뀐 뒤엔 완화돼서 서울 일부 지역까지는 인정해주곤 했다. 솔직히 지하철 몇 정거장만 가면 서울인데 못 가게만 한다고 될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 점프라는 것은 군 생활하는 동안 내내 따라다니면서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그런 내 점프의 역사는 자대 배치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보통 OBC가 끝나고 휴가를 보낸 다음, 전입 신고 전 날 먼저 가서 짐도 옮기고 인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OBC가 끝나고 휴가 동안 여자 친구와 여행을 갔다 오면서 크게 싸웠다. 거의 깨질 뻔한 분위기여서 무거운 마음으로 부대로 갔는데 운이 좋게도 자대 배치 다음 날 바로 전투휴무가(보통 야외에서 숙영 하는 훈련이 끝나면 그 보상 개념으로 주어진다) 있어 하루 더 쉴 수 있었다. 

     

그런데 당장 숙소에 자리가 없어 2일 후에 전역하는 2년 선배 장교와 같이 지냈다. 부대에 가서 간략하게 인사를 나누고 일과가 끝난 뒤 숙소에서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대나 사람들 관련된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것저것 조언을 받았다. 그러다가 선배에게 여자 친구와 싸우고 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 선배도 자대 배치받자마자 여자 친구와 깨진 경험이 있다며 나의 이야기를 공감도 해주고 걱정도 해주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해해 주는 게 고마웠다.


그런데 그날 밤 선배는 술 약속이 있다고 나갔고 집에서 혼자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뭔가 불안했다. 전화를 받았는데 역시나 헤어지자는 말을 했고 정상적인 멘틀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이 일찍 떠졌고 시간을 보니 7시였다. 선배는 새벽에 들어와 아직 자고 있었고 조심스럽게 숙소를 빠져나와 선배한테는 마음이 답답해서 산책 좀 하고 오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지하철 타고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여자 친구에게 달려갔다. 물론 불안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될 것 같았다. 

여자 친구의 집으로 찾아가서 많은 대화를 나눴고 우여곡절 끝에 겨우 마음을 다시 잡았다. 

이제 막 화해를 한 상태라 더 있고 싶지만 오래 있을 상황이 아니라 지금 상황을 설명하고 같이 밥만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근처 식당에 들어서서 주문을 하려고 메뉴판을 보는데 갑자기 동기한테 전화가 왔다. 뭔가 불기했다.

“어? 왜?”

“야 지금 교육장교님이 부대로 들어오래.”
 “지금?”

“어 지금 들어오래.”
 “나 좀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안 돼. 우리 처음 집합하는 거잖아. 빨리 들어와.”     

전화를 끊자마자 여자 친구에게 지금 들어가야 한다는 말만 하고 헐레벌떡 뛰어서 택시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역까지 오는 건 좋았는데 지하철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시계를 보며 마음은 초조한데  당장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시나 핸드폰이 울릴까 쳐다보면서 전화 오면 뭐라고 말해야 되나 핑곗거리를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늦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심장이 덜컥하면서 발신자를 확인하니 그 선배였다. 솔직히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회피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충성! 소위 이산규입니다.”

“교육장교님 들어오라는 연락받았어?”

“네 그렇습니다.”

“지금 어디냐?”

“지금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 어디냐고.”

“저.... 그게....”

이 사람이 내 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어차피 들킬 거 같았다.

“그게... 사실... 위수지역에서 좀 벗어났습니다.”

“여자 친구 만나러 갔어?”

“네 그렇습니다.”

“에휴 그래서 잘 해결됐냐?”
“네 잘 해결했고 지금 빨리 들어가겠습니다.”

“얼마나 걸리는데?”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일단 내가 교육장교님한테 얘기해볼 테니까 들어오고 있어.”

“죄송합니다.”

“어 일단 끊어봐.”

첫날부터 점프라니. 아마 찍혀도 단단히 찍힐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배한테 어제 고민상담을 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선배한테 다시 전화가 왔고 운이 좋게도 그리 중요한 일로 부른 것은 아니어서 선배가 부모님이 오셔서 잠깐 식사하러 나갔다고 잘 말해준 덕분에 시간을 벌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자대 배치 첫날부터 쫄깃한 경험을 했다.      


그렇게 내 점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원래는 이렇게 쫄깃한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생각해야 되는데 난 주말이면 점프를 밥 먹듯이 했다. 

비록 우리 부대가 항상 대비태세를 유지하는 상비사단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규율이었고 그것을 지켜야만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연애에 몰두해 있었고 그걸 지키기 힘들었다. 평일에 그렇게 일했으면 보상의 개념으로 주말엔 좀 힐링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항상 점프할 때는 가벼운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만약 걸리면 전역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그래서 지금 전역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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