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의 병영일기
심장이 안 좋았던 신병에게는 별명이 하나 있었다.
그는 자대 전입 오자마자 선임들에게 '18세'라고 불렀다.
언뜻 들어보면 욕설과 같은 별명이 그에게 붙은 이유는 그 친구에게 욕설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실제 나이나 정신연령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여자 친구 나이였다.
그 친구의 나이는 21살이고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왔다. 그리고 1년 정도 된 그의 여자 친구는 아직 미성년자인 18살이었다. 성인이라면 3살 차이는 차이 나는 것도 아니지만 앞자리 수가 1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이하 아청법)이 시행된 후 '철컹철컹'이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계속 돌고 있던 시점에 고등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의 심장 문제와 별개로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하지만 당시 지휘관 입장에서 볼 때는 흥밋거리보다는 걱정거리였다. 여자 친구 입장에선 아무래도 많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됐다. 남자 친구 군대 보낸 모든 여자들이 힘든 건 매한가지지만 고등학생 신분에 군대 간 남자 친구를 기다린다는 것이 흔한 일도 아니고 주변에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조언 구할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아 더 험난한 여정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게다가 이 친구는 여자 친구 의존도가 상당히 높아 보였기 때문에 다툼 하나에 멘탈이 흔들릴 것 같았고 이별이라도 한다면 무슨 짓을 할까 심히 걱정됐다. 특히, 아직 부대 적응이 덜 된 상태에서 이별이 찾아온다면 더 힘들어 할게 분명했다.
그래서 수도통합병원으로 진료를 데려 가던 날, 이 친구와 둘만의 비밀을 하나 만들었다.
진수(가명)가 아침 일찍 부대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동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10시쯤이었다. 병원 진료는 14시였기에 시간이 좀 뜨는 상황이었다. 밥을 먹어도 30분 채 걸리지 않는데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지 떠오르지 않았다.
"진수야 시간이 많이 남는데 뭐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딱히 생각나는 데가 없습니다."
"PC방이라도 갈래?"
"전 어디든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부대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내가 지휘관이다 보니 선뜻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 친구 집이 서울이라는 게 생각났다. 게다가 마침 방학시즌이었다.
"너 여자 친구도 서울에 있나?"
"네 서울에 있습니다."
"그럼 잠깐 만나고 갈래?"
"아..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아 아직 방학 안 했나?"
"방학은 했는데 보충수업한다고 들었습니다."
"보충수업이면 오전이면 끝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전 정말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여자 친구 지금 어딘지 한번 연락해봐."
아직 부대 온 지 얼마 안 된 친구라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해서인지 말은 거절하고 있지만 표정은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떠보였다. 일단 언제쯤 끝나는지 연락을 해보라고 하고 여자 친구의 학교 쪽으로 차를 돌렸다. 그리 오랜 시간 만남은 줄 수 없지만 점심이라도 같이 먹고 들여보내면 부대 적응에 힘이 될 것 같았다. 분명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내가 책임지면 그만이었다.
학교 앞에 도착하니 마침 보충수업이 끝날 시간이라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진수의 여자 친구의 모습도 보였다. 그 나이대의 친구들만 갖는 그런 풋풋한 모습이었다.
여자 친구는 오늘 폐인으로 왔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놀랬다며 투정을 부리고 진수는 그래도 이쁘다며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 순간 난 그저 택시기사 정도가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둘만의 대화를 하며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 모습이 좋아 보이면서도 몇 시간 뒤면 다시 헤어질 이 연인이 안타까웠다.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먹이고 진수의 여자 친구를 집 근처로 데려다준 뒤 우리는 원래 목적인 진료를 받으러 갔다. 그리고 진료를 받고 돌아가면서 이 일을 절대 함구하라고 일렀다. 나야 괜찮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친구의 선임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아니꼽게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병원진료이벤트(?)가 무사히 끝나고 진수는 임무수행능력은 부족하지만 특별한 문제없이 부대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2달 후.
설 연휴라 아침부터 혼자 읍내에서 나가 있었다. 밥을 먹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오는데 전포대장한테 전화가 한 통 왔다.
어제 새벽에 진수가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자살생각을 하고 있다고 면담을 요청해왔다고 했다.
우선 전포대장이 면담을 했고 지금은 안정이 됐다고 하지만 직접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부대에 들어가서 진수를 불렀다. 진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자초지정을 물어보니 여자 친구가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헤어지자 그랬고 어제는 솔직히 군화끈을 풀었다가 다시 메고를 반복했는데 전포대장이랑 면담을 하고 그래도 안정이 됐다고 얘기했다.
처음에 염려했던 우려는 역시나였고 내가 선물해준 이벤트는 둘의 인연을 잠깐 늘릴 수는 있었어도 거스를수는 없었다. 결국 이렇게 돼버리고 만 것이다.
여기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위로의 말은 해줄 수 있지만 그것이 그리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이 친구가 자살생각을 다시 하지 않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원하면 휴가를 내보내 주는 것밖에.
다행히 본인이 조금 안정이 됐고 이제 자살생각 같은 것은 안 하겠다고 했다. 휴가도 당장은 괜찮으니 다음 달에 올린 정기휴가만 나가면 된다고 했다. 아마 힘든 것도 힘든거지만 자신이 힘든 것을 남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당직사관들에게 특별히 관심 있게 지켜보라고 일러뒀고 틈틈이 면담을 하며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 후 크게 문제는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수는 전 여자 친구에 대한 마음은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 부대에도 충분히 적응을 했고 어느새 상병까지 달았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제 몫은 하는 친구가 됐다.
그리고 당직근무를 서던 어느날.
새벽시간에 진수가 사격지휘 상황병으로 들어왔다. 잠이 슬슬 오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한 상황이라 진수에게 말을 걸었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슬쩍 연애 근황에 대해 물었다.
"진수 요새는 만나는 여자 없나?"
"요새는 없습니다."
"저번 휴가 때 만난 여자 없었어?"
"만나긴 했는데 그냥 친구들이었습니다."
"왜 친구가 여자 친구 될 수도 있지. 그중에 관심 가는 애 없어?"
"아 걔네들 중엔 없는데.... 저한테 관심 있어하는 여자는 하나 있었습니다."
"오? 그래? 누군데?"
"근데... 아... 그게..... 그냥 말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니 네가 말 꺼내놓고 왜 궁금하게 말을 하다 말아?"
"저기... 그게 좀 그래서....."
"왜 뭔데 그래?"
"그게 친구 동생인데 제 사진 보고 잘생겼다면서 카톡 보내고 그랬습니다."
"친구 동생? 몇 살인데?"
"그게 좀 걸려서...."
"왜 전 여자 친구의 친구라도 돼?"
"그게 아니라... 친구 동생이 13살입니다."
"..................................."
물론 진수가 아무리 연하가 취향이라도 그런 어린 친구까지 여자로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날 진수를 헌병대로 넘기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