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의 병영일기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다는 뜻으로 웃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을 할 때 자주 쓰인다. 웃어른이라 하면 보통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그 사전적 뜻을 보면 나이나 지위, 신분, 항렬 따위가 자기보다 높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모시는 어른으로 나이에 국한된 말은 아니다.
우리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년이 같으면 거의 나이가 같았다. 그래서 학년이 높으면 나이도 많고 학교도 오래 다녔으니 선배들을 웃어른으로 보았는데 20살이 되면서부터 이 체계는 깨져버렸다.
대학부터는 들어가는 시기가 제 각각이다 보니 학교를 늦게 들어가서 나이가 많아도 학번이 낮은 경우가 흔한 일이 된다. 이렇게 되면 나이가 많은 사람이 웃어른인지 학번이 높은 선배가 웃어른인지는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 보통 이럴 경우 학번도, 나이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군대에서 만큼은 이 상호존중이라는 것이 없어진다. 철저히 계급 위주로 가며 자신보다 계급이 낮으면 나이와 관계없이 무조건 반말을 한다. 군대에서는 나이는 사라지고 계급만 남게 된다. 그래서 군대에 늦게 들어간 사람들이 나이 어린애들한테 갈굼 당하는 게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 같은 경우, 한 살 많은 군대 동기와 대학 동기가 있는데 둘은 서로 친구이다. 하지만 군대 동기에게는 "야"라고 부르고 대학 동기한테는 "형"이라고 부른다. 뭔가 족보가 꼬이는 느낌 같지만 그만큼 군대에서의 나이와 사회에서의 나이가 다르다.
하지만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계급 체계라고 해서 나이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이를 무시하는 부류가 있고 나이를 무시 못 하는 부류가 있다.
대외적으로는 군대에 "형"이라는 계급은 없다며 그렇게 호칭하는 것을 안 된다고 말하지만 동기들 사이에선 나이가 많으면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병사들 사이에서도 나이 많은 동기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나는 나이를 무시하는 부류였다. 3살 많은 동기가 있었는데 형이라 부르진 않았다. 물론 나이가 많은 부사관의 경우 당연히 존중하지만 계급체계를 철저히 따라왔고 군대에서 나이는 고려할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포대장으로 부임하고도 마찬가지였다.
포대에는 나보다 3살 많은 병사가 한 명 있었다. 3살 많은 동기한테도 막 대했기에 나이가 많다고 껄끄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병사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군대라고 해서 나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우(가명)는 사회에서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늦게 들어온 케이스였는데 행정보급관과 나이가 같았다.(행정보급관이 어린 편이었지만) 보통 늦게 군대에 들어가면 나이로 갈굼 당한다고 하는데 영우의 경우 나이차가 워낙 많기 때문에 선임들도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렇게 늙어 보이는 얼굴이 아니어서 다른 병사들 사아에서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병사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영우는 첫 면담부터 성숙함이 묻어났다.
병사들과 면담할 때 항상 "1년 9개월의 시간이 낭비가 될지 자원이 될지는 본인이 하는 것에 달려있다"라는 말을 했는데 영우는 그런 말을 할 것도 없이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몇 없는데 그것을 적극 실천하고 있었다. 밖에서 공부만 하다 와서 체력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군대에서만 주어지는 체력단련 시간을 적극 활용해 체력을 기르고 있었고 개인 여가시간에 티비나 사지방보다는 공부를 하면서 보냈다.
병영생활 또한 잘해서 병사들 사이에서 계급과 상관없이 맏형으로 신뢰받고 있었고 아직 방황이 많은 어린 친구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또한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병사들의 의견을 모아서 포대에 개선사항이 있으면 건의를 하기도 했다. 본인도 나이를 의식해서 잘 나서려고 하진 않지만 필요할 땐 나서며 그 외에는 뒤에서 조용히 살림꾼 역할을 했다.
덕분에 초반에 포대 지휘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 영우가 정말 고마웠지만 내가 딱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이 많다고 대우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고맙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영우가 분대장을 할 때도 교체시기가 꼬여 4개월 이상 해야 되는 것을 3개월밖에 못 했다. 원래 분대장을 4개월 이상 할 시 3박 4일이 나오기 때문에 전역이 4개월보다 적게 남을 경우 분대장을 안 시키고 4개월 이상 남은 후임에게 분대장을 준다. 하지만 그는 3개월이라 휴가를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대장을 하겠다고 자처했다. (분대장을 단지 휴가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대에서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장유유서라는 말로 따지면 군대에서는 내가 '장'이었기에 '유'인 그를 대외적으로 공경할 순 없지만 존중은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분대장을 4개월을 못 채웠지만 임의대로 2박 3일의 휴가를 줬다. 물론 나중에 이것 때문에 말이 나왔지만 그 정도는 내가 감내할 부분이었다.
영우를 보며 계급 사회인 군대에서 계급에 맞는 행동만을 생각해왔는데 나이에 맞는 행동이라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계급은 계급일 뿐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