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사진찍기 놀이(?)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사나운 동물이 이빨을 앞세우며 달려드는 듯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사진.
멋진 풍경을 담아 누군가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주는 사진.
사회적 이슈를 만드는 날카로운 보도사진.
쭉쭉빠진 미녀들의 아슬아슬한 모습과 농염한 색감으로
몸의 얕은부분을 찌르는듯한 사진...
그런 사진들 보다는,
(아니, 그런사진들을 찍기에는 기술도 없고, 감성도 부족했다.
'시청 앞에서의 키스'로 유명한 '로베르 두아노' 처럼은 아니지만)
그냥 기억하고 싶은 일상의 순간을 온전히 담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
'온전히 담는' 이라는 나의 희망은 그냥 희망일 뿐이다.
'온전히 담는'을 매번 온전히 할 수만 있다면
밥벌이 수단이 달라졌을지도 모를일이다.
사진을 남기는 마지막 행동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은, 그 즉시 과거의 순간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모습이
정지된 모습으로 영원의 시간을 갖는게
사진이 가진 또하나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산정상에서 하룻밤을 잤다.
아침해가 떠오르면,
간밤에 깊숙이 내렸던 산속의 모든 이슬들은 구름으로 변신하며
데워진 공기와 함께 위로 떠오른다.
마침내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은 뭍히고 키큰 봉우리들만 섬으로 남기는
운해를 만든다.
황홀했던 운해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자주 찾던 영남알프스의 재약산 사자평을 다시 찾았다.
수미봉에 조용히 텐트를 쳤고,
한밤중 쏟아지는 별빛때문에 무언가에 감사해야 했다.
하지만, 전날밤의 선물이 과분하였던지,
다음날 운해까지는 받지를 못했다.
하룻밤 지낸 자리를 정리하고, 출발한 하산길
사진 동호회에서 온듯한 한무리의 사람들은 다들 박격포같은 카메라를 하나씩 들쳐매고
시끌벅적 올라온다.
히말라야 고산을 무산소 등반 하는 듯한 모습들이다.
야생화가 한창인 계절,
무리속 한사람이 등산로 나무 울타리를 타고 넘어가
한무리의 야생화들 중 한송이만 남기고 주변의 야생화를 모조리 꺽는다.
결국 한송이만 남긴 야생화 앞에 웅크리고 엎드려 사진을 찍어 댄다.
그치는 사자봉을 배경으로 외로운 야생화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던 모양이다.
ㅉㅉ
'사진' 이라는 취미도 이상하게 흐르면,
남자들 등꼴이 빠지는 세가지 취미중 하나가 되어 버린다.
'오디오', '사진', '시계'
실력도 없는데, 이런저런 렌즈가 욕심이 나서 사모으는 내모습에
사자봉에서 만난 그치의 모습이 겹쳐
이건 아니다 싶었다.
꼭 필요한 두세개의 렌즈만 남기도 다 처분했다.
요즘은 가끔씩 날씨에 이끌려 카메라를 매고 나간다.
나가봐도 건지는 사진은 카메라보다는 휴대폰에 더 많이 남는다.
기술이 좋아져서, 웬만한 사진은 휴대폰으로도 충분하다.
아웃포커싱은 기본이고, 화이트발란스까지 알아서 맞춰주니,
아직은 젊다고 생각하는 나이인데도,
IT시대 한가운데서 어지럽다.
직접 촬영한 사진들을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인상깊게 본
사진들이 있다.
일종의 시리즈물이었는데,
"천개의 얼굴"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아마츄어 작가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개성있는 얼굴 촬영물들을
아무런 꾸밈없이 게재했다.
한사람 한사람 모두 다 다른 얼굴들.
쌍둥이 처럼 닮은 또 다른 얼굴들.
수많은 얼굴들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것은
피사체인 그들의 눈(眼)이다.
같은 인종의 얼굴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눈은
손가락의 지문처럼 비슷한듯 하지만,
모두다 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
보이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진으로도 보여줄 수 없는것도 있다.
그순간 그대로의 모습은 보여줄순 있지만,
그때의 감정과 보여주고 싶은 느낌까지 다 표현하기는
실사의 사진이 오히려 불리할때도 있다.
[출처 : 네이버]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화가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그림속 소녀의 눈을 누구를 연상하며 그렸을까?
싫어서 돌아서는 마지막 얼굴인듯,
뜻밖에 부름에 놀라는 첫 얼굴인듯,
기쁜듯, 슬픈듯, 어떨때는 유혹하는듯 보인다.
보는 나의 감정에 때마다 달라보인다.
진주귀걸이 보다 더 반짝여 보이는 그소녀의 눈망울은
보는이의 눈을 한참이나 잡고있다.
성당에서 봉사활동의 하나로
사진 찍는일을 했었다.
전례와 각종행사때 필요한 사진을 찍어 사이트에 올리는 일이었다.
한번은 성당에 다니시는 교우분들 중 연세가 많으신분들을 위해
영정사진 촬영을 해드리기로 했다.
초기에는 망설이던 분들이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놓으면 장수하신다'는 말씀 때문인지,
점점 신청하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몇차례 걸쳐 일요미사후 따로 자리를 만들어 촬영을 했다.
촬영을 하고 인화를 한후 비싸지 않은 액자에 담아 드렸다.
그중에 한분이 생각난다.
친구분들은 다 찍는데 한사코 마다하셨다.
하루는 벤치에 혼자 앉아 계시길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부끄럽다며 꺼낸 말씀은 몇년전 교통사고 때문에
얼굴이 못나져서 그때 이후로는 사진을 한번도 안찍었다고 하셨다.
자세히 본 어르신 얼굴.
여기저기 깊게 패인 주름위로 흉터가 보인다.
'할머니, 지금도 많이 고우세요.
흉터는 제가 안보이게 해드릴테니,
이번에 한번 찍어 보세요.'
마침내 용기를 낸 할머니.
혹시 또 망설이실까 싶어, 바로 촬영을 했다.
그 벤치에서 찍은 사진을 며칠동안 만지작 거렸다.
잘 하지 못하는 포토샵으로 얼굴에 흉터를 가리고,
반만 남아있던 왼쪽 눈썹도 그려 넣었다.
너무 과한거 같아 지나치게 지웠던 주름과 검버섯을 다시 살렸다가
지우기를 몇번을 되풀이 했다.
일주일이 지나, 미사를 마치고 나오시는 할머니께
조심스레 포장한 액자를 드렸다.
벤치에 앉아 당신의 영정사진을 보시는 할머니.
사고나기전 모습이랑 똑같다고 아이처럼 좋아하신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촉촉한 눈으로 몇번을 인사 하셨다.
"할머니, 할머니는 어디가 제일 예쁘신줄 아세요?
할머니는 눈이 제일 예쁘세요.
평생 좋은것. 이쁜것만 보고사신 분인가 봐요."
사실이었다.
사진파일속 할머니의 눈은 웃고 계시지는 않지만,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셨다.
영정사진 촬영이라는 생각에
남겨두는 자식들의 마음편함을 원해서 였을까?
하는 짐작도 해봤다.
어린아이의 눈망울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천사의 눈이 이렇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서
볼꼴 못볼꼴을 보다 보면
눈망울은 힘을 잃고, 두터워지고, 경계가 모호해지며, 시들어 간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야가 어두워지며 좁아진다.
마침내 눈을 감고 잠에 든다.
매일매일의 잠도, 마지막이 될 긴 잠에 들때도 그럴것이다.
매일밤 셔터를 내린 가게 마냥 자아를 숨기다가,
결국은 하얗게 타버려 흩어지는 숯마냥 가벼워 질 것이다.
잠들어 있지 않는한
몇초에 한번씩 과거의 순간을 찍는
두개의 렌즈와 두개의 셔터
무엇이든 행복하게 기억될 파일들이
많이 저장되길 모두들에게 주문해본다.
2019. 11. 17. ㅅㅓㄱ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