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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빛나는 별이 되다: 공업계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한 이유

by Jay

2003년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항상 나를 믿고 무슨 일을 해도 미소만 지어주었던 나의 ‘지지 세력’의 빈 자리는 나를 오랜시간 멍 때리게 만들었다. 사실 당시에는 내가 느끼는 바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벗 DH는 빈소에 찾아와 나보다 더 서럽게 울어줘서 고마웠다. 20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엄마는 종종 “그 친구 잘 지내고 있어? 아직도 한 번씩 생각이 나”라고 말하며 친구의 안부를 묻고, 그 녀석의 안녕을 빌어준다.


그 날 새벽, 아빠는 아무리 깨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119에 신고했지만 뜬금없이 경찰이 찾아왔다.

나는 일단 낯선 아저씨들을 붙잡고 빨리 응급실에 데려가달라고 이야기했다.


“학생, 잘 들어봐래이.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검사의 싸인이 있어야 갈 수 있어,

자 일단은 많이 놀랐겠지만서도, 진정하고, 학생은 서에 좀 먼저가고, 다른 가족들이 병원가면 된데이”


신발도 벗지않고 우리 집에 들어온 경찰들은 이 말만 반복했다. 시간의 힘을 견뎌낼 만큼 저 말은 아직도 선명하다. 사람이 아픈데 엉뚱한 사람(?)들이 찾아와 병원으로 이송하지도 않고, 최초 발견자가 누구냐며 취조하듯이 윽박지르기나 하고 말이다. 내가 알고 있던 상식과 너무 다르게 흘러갔다.


“아저씨가 의사도 아닌데 왜 그러는데요? 일단 병원부터 가죠, 좀”

“학생, 왜 이러노, 진정하고 일단 같이 좀 가자. 니가 제일 먼저 발견했제? 병원 바로 몬가신다”


드라마를 보면, 빨리 병원에 가서 전기충격도 하고 이런 저런 수액도 놓아주는 게 당연한데 내게는, 아니 아빠에게는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유도 모른채 ‘서’에 들렀다. 이런 저런 약식 조사를 받은 후, 약 1시간 뒤 S병원에 도착했다. 경찰차를 타고온 나를 바라보던 응급실 근무자에게 아버지를 찾는다고 말하자, 이내 한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나는 하얀 천에 덮여 누워있는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은

“학생, 한 번 보시겠어요? 아버님이 심장이 많이 안 좋으셨는데, 병원에 안오신지 꽤 되셨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멀찌감치 떨어진 데스크에 서있던 한 간호사는 “빨리 원무과에 다녀오세요”라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당시의 이별의 전말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선명하지 않다. 흔히 큰 일이 생기면, 경황이 없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말을 이제서야 실감한다.


아빠의 빈 자리는 하나씩 몸으로 와닿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팔베개를 해주던 아빠가 옆에 없다는 것. 하교 시간에 맞춰 집 근처 길목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빠가 보이지 않다는 것. 등하교시 베란다에서 “아들”이라고 부르며 손을 흔들어주며 ‘공중 배웅’을 해주던 아빠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고 나를 둘러싼 세상은 빈자리 투성이었고, 나의 시야는 고요하게 멈춰있었다.


장례가 모두 끝나고, 그저 나는 학교를 나가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특별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와 누나는 우리가 힘을 내어 잘 살아내보자는 이야기를 습관처럼 이야기했고, 나는 그저 이따금씩 “그래”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드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학교에 나가 내 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친구들은 내게 다가와 말 없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원자 힘내라”, “괘안나”, “밥은 챙겨 뭇나”는 닭살돋는 이야기를 건넸고,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끄덕여 반응했다. 사실 뭐라고 말하기도 그랬고, 무언가 내 마음을 표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친구들은 섣부른 위로도, 고인을 회상하게 할 법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된 지금,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빈소에 찾아갈 때면 사인은 어떻게 되는지, 고인은 어떤 분이셨는지 먼저 물어보지 않는다. 그 말을 꺼내고 물어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임을 알기에, 그 때 기억이 있었기에.


그 날 종례후 담임선생님은,


“한 주정도 마음을 추스리고 어머니 돌보는 게 어떻겠노.

나머지 뒷처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일단 내 차를 타고 집으로 가자”


선생님 차로 향하는 복도 끝에서 반장 JM은 나를 불러 세웠다.


“원자 잠깐만! 이거... 아-들이랑 모았거든.

많지는 않은데, 큰 일 생기면 돈 많이 든다카더라. 잘 보탰음 좋겠다”


그는 하얀색 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뭐고, 왜들 이러노, 괘안타”


주는 자와 받지 않으려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선생님은 친구들의 성의를 물리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며 그 돈은 어머니께 드리라고 조언해주셨다. 집으로 가는 길, 선생님의 차 안에서 하얀 봉투을 꺼내보았다. 봉투의 뒷면에는 ‘3학년 1반 친구들 일동. 사랑한다 친구야, 힘내자’이라는 글이 써 있었다.


선생님이 마련해준 한 주의 시간동안 나는 그저 먹고 잤다. 새벽까지 늘상 하던 게임도 끊어버렸다. 날이 밝을 땐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빈자리를 하나씩 메워나갔다. 사망신고, 휴대폰 말소, 통장 정리, 채무 조회, 한정 상속 등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는 일을 하나씩 찾아가며 해결해나갔다.


그리고 학교에 나가야하는 시간이 도래하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친구들이 나를 너무 불쌍하게 바라보면 어쩌나, 혹시 애비없는 자식이라고 흉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하나 말이다. 아빠에 대한 애도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저 앞으로 내가 다가올 일들에 대한 걱정 뿐이었다.


등교 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무실에 들어가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출석부와 학급일지를 챙겼다. 항상 교무실 문을 여시는 담임 선생님은 내 뒤통수에 대고 우렁차게 말씀하셨다.


“원자야, 이제 마음을 단디 먹어야 된다. 용기를 내야 한다. 알았나?”

“예, 쌤. 감사함다”


나는 중학교 학창시절 내내 ‘학급서기’라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매일 등하교를 할 때마다 교무실에 가는 것이 내 일과였다. 중학교 1학년 때,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학급서기를 하라는 당시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고 시작하게 됐다. 여기서 학급서기란 그 날 시간표에 따라 수업은 어떤 단원과 내용으로 진행되었는지, 일일 출결 상태와 담임 선생님의 공지사항 등을 학급일지에 기록하는 일을 하는 하나의 ‘보직 학생’이다. 3년동안 학급서기를 하는 나를 보며 어떤 여자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공부는 좀 모해도(못해도) 말이지. 글씨를 잘쓰고 성실하니 무슨 일이라도 잘할 수 있을거야, 원자는 우리 학교 서기관이야, 서 서기관, 하하하”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칭찬인지, 공부 좀 하라는 말인지. 당시 서기관이라는 말이 공무원 직위인지도 모르고 그저 내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것으로 생각해 “뭐 저런 사람이 다있단 말이고”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중에 ‘서기관’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후, 그 선생님이 참 고마웠다. 어린시절부터 나를 지체높은 공직자로 불러주었으니까. 혹시나 듣다보면 이뤄진다는 동서고금의 명언처럼, 나를 미래의 공무원으로 만드려는 주문과도 같았다고 할까.


어쨌든 나는 개인적으로 정리도 좋아했고, 글씨 잘 쓴다며 인정받는 학급서기라는 일이 참 좋았다. 무엇보다도 아침, 저녁으로 공식적으로 교무실에 출근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아침 일찍 교무실에 들어가 학급일지와 출석부를 챙겨 팔짱에 끼고 교실로 향하는 나를 복도 창문으로 비춰보면 마치 선생님이 된 착각이 들어 으쓱해졌다. 게다가 당일 수업이 끝나면 다시 출석부와 일지를 들고 교무실에 들어가 담임선생님께 확인 서명 받고, “오늘도 고생이 많았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미소가 지어졌다.


종종 선생님들이 모여 이야기 나눌 때,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서서 귀동냥하며 같이 맞장구치고, 함께 화를 내는 일도 있었다. 당시 국사 Y선생님은 종종 “과거에 사관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바로 자네는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네”라 말씀해 주시기도 했다.


아버지가 떠난 3주 정도 시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변함없이 일지에 서명받고 하교하려는 찰나, 담임 선생님은 잠시 여기에 앉아보라고 이야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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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자네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네. 전처럼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네. 내 말 잘 들어 두시게. 열심히 살아야 자네에게 다시 빛이 나게 되는 걸세. 빛이 난다는 것은 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일세. 지상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가 자네를 쉽게 찾아볼 수가 있네. 자네는 그런 소중한 존재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네.”


도대체 빛이 나는 삶이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눈물이 맺혔다. 나라는 사람이 뭐길래 선생님을 이렇게 나를 부여잡고 있었을까.

아동문학 작가였던 선생님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셨다.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나의 삶을 지탱해오는 중요한 문구가 되었다. 그 후, 학급일지에 싸인을 받으러 갈 때마다 “여기 앉아보시게”라며 옛 선인들의 명언이나 어려움을 극복한 고사성어를 종종 이야기해주셨다. 선생님은 나를 그렇게 내려놓지도 방치하지도 않으셨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P공업고등학교 학교 소개라는 팜플렛을 주었다. 학교도 이렇게 전단지를 만드는 구나 싶었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빨리 취업하여 가장으로서 역할을 빨리 수행할 수 있고, 직장을 몇 년 다니다가 야간대학도 갈 수 있는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으니 이 학교에 진학하는 게 어떻겠냐며 권유했다. 덧붙여 어중간한 성적으로는 상위 인문계고를 진학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용의 꼬리’보다는 열심히 기술을 배워 ‘닭의 머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표현까지.


특히 대기업이 운영하는 학교다보니 입학 후 열심히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많고, 졸업 후에는 지역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도 많다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당시 해주셨던 이야기 중 아직도 뇌리에 선명한 것이 있다.


“사실 자네에게 실업계고 진학을 권하는 이유는 일단 빠르게 취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네. 물론 실업계를 가면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것도 현실이고, 동료 선생님들로부터 들어보니 자칫 술이나 담배를 가까이하기 쉬운 환경이라 들었네. 그러나 자네는 그것을 극복하고,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네. 일단 직장을 잡고 가정을 안정화시키는게 중요하네. 그리고 대학은 나중에 가는 것도 좋겠네. 물론 자네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판단해 결정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네”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가 없었기에 담임 선생님의 실업계고 진학 제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출구는 없었고, 그저 다가오는 이 현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마침 컴퓨터를 활용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적성과 흥미에 부합한다고 여겼고, 그 학교에 있는 ‘컴퓨터네트워크과’라는 전공에 입학원서를 쓰게 되었다. 대충 학과 이름을 보니 나중에 비교적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혼자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앞으로 다가올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고, 성실한 자세로 임하나면 ‘빛이 나는 별’이 되는 지름길로 가까이갈 수 있을 것이라 느껴졌다.


그 날 저녁 엄마는 “공고? 내가 뒷바라지 못할 것 같아? 왜 그런 선택을 하는거야"라고 말했고, 누나는 “네가 선택한 길은 좋은데, 견뎌야 할 일들이 더 많을거야”라고 대화를 이어갔다. 누나는 확실히 ‘이과 스타일’이고, 젊은 시절 문학을 가까이했던 엄마는 확실히 감성적이었다. 그에 비해 나의 결정은 단순했고, 일단 저질러보고 뒷일을 처리하자는 생각이 앞섰다. 이어 우리 모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가감없이 쏟아냈다.


사실 이제와 고백하건데 집에서 나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내는 것만 생각했다. 그렇다고 어디에 취업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신중하게 생각해보진 않았다. 상에 올려진 내 밥 숟가락 하나 줄이고 싶었다. 가정 경제에서 ‘입 하나 줄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체감 효과를 가져오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누나가 아들과 남동생 하나 바라보고 뒷바라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기 싫었다. 나의 꿈, 미래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고, 그냥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렇게 한 장의 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게 되었고, 같은해 11월 최종 합격 소식을 받았다. 나는 그렇게 ‘공고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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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Dive


* 원자는 글쓴이의 별명이자 애칭이다. 선생님이 나를 부를 때 쓴 '원자'라는 호칭은 실명을 대체한 것이다.


※ 본문에 활용된 삽화는 Google Gemini Nanobanana2를 활용하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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