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전공,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것
나에게는 두 개교의 공고 입학 이력이 있다.
먼저, P공업고등학교 ‘컴퓨터네트워크과’에 입학했다. 참 멋진 이름이었다. 마침 그 때는 ‘네트워크’라는 이름이 컴퓨터 산업 분야에서 각광받는 시기였다. 하지만 입학식 날, 교장의 인사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당분간 모기업의 사정으로 졸업생 전원 취업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여러분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학생과 학교는 대등한 계약 관계가 아니다. 학생으로서 교실 현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각종 정책, 제도 등과 같은 결정은 누가 위원인지도 모르는 심의기구에서 결정된 것들이다. 우리는 그저 빠르게 숙지하고, 이를 순응해야 착한 학생으로 거듭날 수 있다.
팸플릿에 적힌 '모기업 취업'이라는 문구를 하나의 약속이라 굳게 믿고 입학한 우리에게 그 축사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조회가 끝나고 교실로 돌아오자, 담임 선생님은 우리 전공조차 없어질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해주었다.
“야, 얘들아, 화내지 말고... 내가 있는 동안은 말이다. 1학년 땐 자격증 2개 이상 따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된다. 학교의 결정하고 상관없이 내일부터 연습장 하나씩 갖고 온나.
하루에 3장씩 빽빽이 하고 검사할거다. 알겠제?”
쉬는 시간이 되자 친구들은 모여 학교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욕설을 끊임없이 퍼부으며 무너진 미래를 성토했다. 국가도, 재단도, 학교도 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입학과 동시에 깨달았다.
실습 시간이 되자 ‘컴퓨터’라는 매력적인 단어 뒤에는 폐쇄적인 성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요리사가 주방에서 설거지만 3년은 해야 채소 썰 기회를 얻고, 미용사가 수천 번의 머리 감기는 작업 끝에 겨우 가위를 잡듯, 이곳의 ‘숙련 지도자’인 교사들도 신출내기 학생들에게 노하우를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학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능과 기술의 세계는 ‘그러는’ 경향이 있다. 오랜 시간 쌓아온 노하우를 새파란 신입생에게 곧장 전수해주기란 지도자 입장에서 ‘본전’ 생각이 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학교는 체계적인 가르침이라는 명목 아래 ‘기초’만 강조했다. 마치 영어 회화를 배우러 갔다가 문법만 주구장창 파는 이치와 비슷했다. 투철한 목표 의식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기능 습득을 위한 지구력은 금방 바닥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시작부터 그 지구력을 시험받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암묵지를 말로 설명하기 곤혹스러운 탓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랜 케이블 끝단에 커넥터를 체결할 때도 시범을 보여주며 “이렇게, 이렇게”라는 말을 하고, “잘 봤지? 이해됐지? 알겠지?”라는 확인만 이어지는 식이었다. 보여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 사이는 그렇게 멀었다.
기숙사 생활은 더 혹독했다. 군대를 가보지 않았지만, 이곳은 흡사 병영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전통이라 불리던 규칙은 분 단위로 나를 옥죄었다. 슬리퍼는 오직 방 안에서만 허용됐다. 복도에 나올 땐 운동화를, 교실이 있는 본관동으로 이동할 때는 반드시 구두를 신어야 했다.
게다가 학년을 구분하는 넥타이 색깔은 곧 계급이었다. 1학년인 우리들에게 다른 색 넥타이를 찬 상대는 무조건 선배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선배’에게 지체 없이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큰 소리로 인사해야 했다.
“야, 이거 이러다간 목 디스크에 걸리는거 아이가”
이제와서 고백하지만, 나는 선배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자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지 않고, 실습 시간 중 몰래 다녀온 적도 많았다. 나중에 이러한 문화는 알고 보니 하나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고, 이를 순조로이 마치게 되는 시점부터는 선배들의 무한한 사랑과 편안한 학교생활이 보장되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일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선배가 인사를 받으며)
“OO야, 잘 지내고 있제? 어려운 일은 없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말해래이”
“요즘에 OO쌤이 많이 갈군다카던데? 담에 우리가 잘 얘기해주꾸마, 와 느그들한테 히스테리 부리고 그라노”
“이번에 OOO 기능사 접수하고, 방학 전쯤에 의무검정 있으니까 이거 꼭 따고”
“그래 니 얘기 마이 들었다. 우리 악대 들어와서 멋지게 연주하고, 추억도 마이 쌓자”
더 가까워지게 되면, 선배가 떠나는 순간 교과서나 값비싼 공구를 물려 준다던지, 실습 시험점수 잘 받는 법, 자격증 취득 노하우, '까탈레나'라고 불리던 선생님들을 다루는 법(?) 등의 고급 정보를 그대로 ‘전수’해준다고 들었다.
그리고 기숙사 1층에 위치한 식당은 매일 저녁엔 묘한 냄새가 교차하는 곳이었다. 갓 지은 밥 냄새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은근한 절삭유로 절은 듯한 공기가 진동했다. 식탁 한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앉은 선배들의 실습복은 소매와 앞섶이 기름때로 절어 있었다. 우리의 복장은 그렇게 엄하게 지적하는데, 본인들은 그러지 않음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가슴팍에는 교표가, 소매엔 ‘안전제일’ 마크가 붙어있는 청색 실습복을 입은 형들을 보며, 나도 곧 저 세계의 일원이 되겠구나 싶은 선망과 염려가 뒤섞인 채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사실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매일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매일 방과후 친구들과 함께 학교 주변 번화가를 전전했다. 마음 맞는 녀석들끼지 몇 천원씩 모아 시간당 6천원짜리 노래방에 들어가 목이 터져라 SG워너비의 ‘Timeless’와 이승철의 ‘긴 하루’를 질러댔다.
그리고 허기가 지면 골목에 있는 치킨집에 들어갔다. 그곳은 교복 입은 학생들이 방문하여 만 원짜리 치킨 한 마리를 시키면 깻잎지와 밥을 덤으로, 그것도 무한리필이 가능한 곳이다. 주인 아주머니는 갈 때마다 “멋진 학생들 왔나? 마이 묵고 공부 열심히 해래이”라는 말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 한마디가 그 시절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온기였는지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이 ‘시한부’ 삶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아빠가 계시지 않는 낯선 타지에서 우리 가족이 홀로 버티기란 무리였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나. 우리 셋은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의지할 곳이 필요했고, 결국 외할머니의 부름에 따라 D 지역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한 달 전, 밥상의 입 하나를 줄여보겠다며 당당하게 떠나온 길이었다. 하지만 다시 짐을 싸는 내 등 뒤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왜 그리고 시렸던지. 어쩌면 나는 거대한 파도 위에 위태롭게 떠 있는 표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이름으로 파기된 약속.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고, 그 누구도 보상받을 수 없는 현실. 나는 그렇게 ‘네트워크 전문가’라는 짧은 꿈을 뒤로하고, 다시금 대전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것은 나만의 진짜 궤도를 찾기 위한 또 다른 행군의 시작이었다.
직업교육을 공부하는 지금의 나는, 종종 그 때 그 '인사말씀'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