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고(工高)를 공고(公告)합니다(4)

3월, 학기초 우리들의 이야기

by Jay

3월이 되면 우리는 서로를 탐색했다. 집안 사정, 졸업 후 뭘 할 건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비슷한 방향을 바라보는 녀석들끼리 자연스럽게 뭉쳤다. 취업파, 진학파, 그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부류까지. 간혹 집안의 사업을 물려받는 희귀종도 나타난다. 우리의 우정은 '진로'라는 줄기를 따라 가지를 뻗어갔다.


“너는 뭐하려고 들어왔어? 취업? 대학?”

“나는 일단 돈을 벌고 싶은데, 기왕이면 삼성, 엘지같은 좋은 곳 가고싶지. 안되면 중견가고”

"좆소* 갈바엔 군대가서 말뚝박는다"

“나는 C대(국립대)나 H대(국립, 야간과정) 갈라고”

“근데 뭘 어떻게 준비해야되냐?”


오래전 일반계고에 ‘대학 법칙’이라는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1학년 때는 서울대가 목표, 2학년 때는 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이라도 갔으면, 3학년 때는 어디든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공고에서도 유사한 대화가 오갔다. 1학년 때는 대기업 생산직 혹은 국립대학교 동일계열 진학을 꿈꾼다. 공고생들이 가장 희망하는 목표다. 첫 짝이 된 친구 J는 시작도 하지 않은 미래를 나에게 물어봤다. 어색함을 깨려는 인사이기도 했고, 단순한 인사 이상의 무게가 실린 질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입학과 동시에 취업과 진학을 고민하며 저울질 한다. 그 줄타기는 졸업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혹시 두 길 모두에서 미끄러지더라도 괜찮다고 여겼다. 군 입대 후, 전문하사라는 이름으로 ‘짱박힐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군입대나 재수, 취준생을 1차 목표로 삼진 않는다.


취업이든 진학이든 1차 선택을 한 뒤에는 2차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업 생산직,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특례가 가능한 중소기업, 유명한 2년제 혹은 ‘괜찮아 보이는’ 4년제 대학 입학이다. 문제는 그곳에서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어떤 곳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선생님들도 4년제 대학 이외에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언제나 부족했고, 그러다 보니 적성이나 흥미를 따져 체계적으로 ‘좋은 선택’을 하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포장이 잘 된 ‘좋아보이는 선택’에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이 말인 즉, 내가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다면 '좋은 곳'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대기업, 지역내 4년제 국립대, 공고생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이름이었다. 입학 초기 한 학기 안에 대략의 방향을 잡았지만, 그건 수시로 흔들렸고 너무 세밀하게 정할 수도 없었다. 큰 틀에서 선택은 우리가 했지만, 최종 선발권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학교밖 세상을 향해 뻗어갔다. 진로를 정하려면 정보가 필요했고, 그 정보는 내가 직접 발로 뛰어 확인한 것만 믿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의 조언은 공고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라 치부됐다. 한편으로는, 성실하게 학교 수업만 따라간다고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도 빠르게 간파했다. 그 해 안 뽑으면 그만이니까.


우리는 다양한 정보에 대해 연대하여 대응하고, 평가해 나갔다. 복도 채용게시판에 붙은 구인 공문 한 장을 보고 그 회사가 어떤 곳인지 난데없이 평가하거나, 생산직 혹은 제조업이라고 쓰여있는 모집 분야가 실제로 어떤 일인지, 내가 할 만한 일인지 두서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다.


때론 단기 알바를 해본 녀석의 경험담이 교실에서 가장 귀한 정보였고, 졸업 후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생존계획을 주고 받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진로지도는 속된 말로 '먹혀들질 않는 것'이다.


이런 주제로 친구 S와 나의 대화는 늘 진지했다. 짜증섞인 듯 말하는 S의 말투는 차분하고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나와 결은 달랐지만, 서로의 '미래지향적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입학한 지 몇 달밖에 안 된 녀석들의 대화치고는 우습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런 대화 속에서 우리는 진로의 방향을 조금씩 수정해나간다.


“야 원자! 요즘 캐드만해서 사람도 안 뽑는대. 내가 다 조사해봤다. 밖에 쓰지도 않는거 3년 내내 배우는건 완전 에바 아냐? 다른 거도 해야돼.”

“뭐 어쩔겨? 일단 학교 가르치는게 있으니까, 할건 해야지.”

“그거 시내 S학원에서 3개월이면 다 뗀다더라고. 3개월짜리를 3년동안 한다고 삼성갈 수 있을까? 일단은 세진 다닐라면 지금부터 돈 버는 게 나은 것 같아. 집에 손벌리기도 좀 그렇고”

“3개월은 그건 그냥 학생 모으려고 광고하는거 아냐? 어차피 학교에서 배우는데 너무 돈 아깝지 않냐? 학원비가 한 두푼도 아닐거고.”

“몰라. 있다 끝나고 거기 S학원 같이 가서 물어보자. 야 근데 이번에 Y가 택배 뛴다는데 한 달에 팔십정도 번다더라, 체력도 쩔어. 지가 하고 싶은날 간다더라고? 저번에 돈 벌어서 반지도 졸라 멋있는거 샀어. 하. 같이 할려?”


나는 기계제도과 소속이었다. 공업고등학교는 주로 기계, 건설, 전기, 전자, 화공 등의 전공으로 나뉜다. 내 경우엔 기계 분야 중 ‘기계제도’라는 세부 영역이었다. 주로 2차원 CAD(Computer Aided Drawing) 프로그램으로 기계부품을 그렸고, 졸업 후 현장에서 도면을 그리는 제도 기사가 되는 것이 우리 전공의 목표였다. 설계자(designer)의 아이디어나 스케치를 규격에 맞게 컴퓨터 도면으로 옮기고, 그 도면을 바탕으로 제작(대량 생산)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중간 단계의 일을 수행하는 기능공(technician)이다.


쉽게 말하면, 3차원 형태로 된 제품만 보고 대량 생산을 할 수 없으니 2차원 도면으로 부품 하나씩 자세하게 나타내야 한다.


과거에는 ‘드라프터’라고 불리는 만능제도기를 사용해 손으로 부품을 직접 그렸다. 1B, 2B, 3B, 4B부터 1H, 2H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필을 가지고 선의 굵기를 표현하는 것은 예술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내가 입학한 2004년 무렵, 산업 현장은 이미 한 발 나아가 있었다. 3차원 CAD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설계자가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확한 치수로 그려내고, 2차원 도면을 자동으로 추출하는 방식이 퍼지고 있었다. 즉 설계자가 직접 도면까지 그리는 세상이 오고 있었고, 제도 기사의 자리는 예전같지 않았다.


게다가 사설학원에서 3개월이면 배울 수 있는 기술을, 그것도 3차원도 아닌 2차원 CAD를 학교에서 3년동안 배운다는 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 가지 기술만 가지고는 취업은 어림없다는 생각이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학원에서 미리 ‘마스터’ 한 뒤, 현장에 빨리 들어가 일머리를 익히는 게 더 빠른 길 아닌가.


image.png 2차원 CAD 프로그램을 가지고 그리는 화면이다(전산응용기계제도 기능사 작업 화면, 개인 소장)


문제는 학원비였다. 당시 공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들이 얼마나 치밀했냐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제도과 학생을 기준으로 학원에 등록하면 초반 3개월은 CAD 프로그램의 각 기능을 숙지하기 위한 수업이 진행된다. 이후, '전산응용기계제도기능사', '전산응용건축제도기능사', '컴퓨터그래픽운용기능사', 'ATC마스터(캐드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고 세뇌가 시작된다. 자격증 과정 하나당 약 25만원 정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격증 실기시험을 합격할 때 까지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자격증 실기 시험은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누가 계속 옆에서 지켜봐주는 게 아니라 내가 수행한 결과물을 점검받는 정도 밖엔 없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의 자격증을 따고 나면 나머지 자격증을 따야될 것 같은 부채의식이 생겨난다. 그러다보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되어 이거 못해먹겠다 선언하며 갑자기 다른 기능을 배우겠다고 이탈을 시도하는 무리도 생겨난다. 부품을 직접 보면서 도면을 그려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만 부품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돈을 빨리 벌기 위해 공고에 왔는데, 졸업도 하기 전에 자격증을 따야한다는 이유로 더 큰 돈을 써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 셈이었다.


어쨌든 친구 S는 그런 녀석이었다. 스스로 알아보고, 직접 부딪쳐보고, 거기서 얻은 것을 친구들에게 가감 없이 나눠줬다. 이타적인 녀석이었다. 그런 행위를 통해 조각난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학원 정보, 택배 알바 정보, 노가다 현장의 분위기까지 다 알려주고 싶어했다.


의리라고 하기엔 투박했지만, 같은 처지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친구가 건네는 정보는 정말 소중했다. 친구 S의 적극적인 모습은 주변을 부유하던 다른 친구들에게도 자극이 되었고,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 것은 아니었다. 같은 방향의 버스를 탄 것뿐이지, 경유지와 목적지는 각기 달랐다.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자리는 한정적이었다. 자격증도 면허도 없는 미성년자가 끼어들 수 있는 곳이라곤 택배 상‧하차 철야 알바가 최적이었다. 매일 나가는 건 아니고, 내가 필요한 날에만 찾아가 일하고 일당을 바로 받을 수 있는 구조. 고강도 노동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일당 7만원이라는 비교적 높은 수입 덕에 몇몇 ‘사나이들’ 사이에서는 도전과 모험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계약서 한 장 작성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으로 각종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일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경험이었다. 운동량(?)도 제법 되었기 때문이다.


image.png 10대들이 말하는 '택배 알바', 2015년 8월 9일, TJB 뉴스 캡쳐(2000년대 초반보다 일당이 더 낮아 의문이다)

※ 오랜 시간이 지나 이러한 일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는데, 학생들이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구조를 다루기 보다, 그저 미성년자가 택배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다루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미성년자가 심야에 일하는 것만으로도 문제 소지가 다분했지만, 그 누구도 이 점을 언급하지 않았고 지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진입의 특수성으로 인해 은밀하게 관리되었다. 약속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가게 되면 스타렉스 한 대가 학생들을 데리러 온다. 물론 사전에 협의된 인원만 그 차에 탑승할 수 있다.


이 일은 현재 일하고 있는 친구의 보증을 통해 새 인물을 들이는 구조이기에 ‘소개자’의 신용이 중요하게 작용했고, 설령 그만두더라도 소개해 준 친구의 체면이 걸린 일이라 조심스러웠다.


이외에도 PC방 야간 관리, 편의점 심야 근무 및 식당 홀서빙 등도 제법 괜찮은 일자리로 여겨졌다. 돈을 번다는 건 단순히 지갑이 두꺼워지는 일이 아니었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감각, 내 삶을 내가 이끌고 있다는 느낌. 그게 우리에겐 컸다. 또래와 비교했을 때 성공의 문에 가까워지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켜 어리지만 노동자로서 묘한 우월감도 있었고, 가정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무언가를 돈으로나마 메울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던 거다.


나는 매일 앉아서 여유롭게 영어 단어나 외우고 책이나 보면서, 실습 시간엔 캐드나 그린다. 동력전달장치를 그리다 보면 어디에 써먹을 순 있을지. 애들은 벌써 돈도 벌고, 사고 싶은 것도 사면서 멋지게 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 일 시작하는 게 뭔가 학교생활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확실한 일자리도 아닌 듯하고 모든 게 다 어정쩡하다. 나는 오늘도 SH와 운동장에서 별만 보다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2004년 5월 14일, 나의 일기)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은 계속됐다. 친구들이 어린 노동자의 삶에 진입하는 모습은 마치 먼저 출발선을 끊은 것처럼 보였다. 공고라는 곳은 졸업 전, 반드시 무언가를 정해야한다는 공기가 팽배했고, 그 분위기가 나에게도 끊임없이 선택을 재촉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이 아니면 잡을 수 없는 다른 길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었다. 눈앞의 수입보다 좀 더 먼 곳에 무게를 두고 싶었다. 아직은 학생이니까. 하지만 그 먼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나도 몰랐다.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채, 희뿌연 연기 속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친구들이 기피하는(?) 도면 그리기에 집중했고 쉬는 시간마다 귀마개를 꽂고 강박적으로 영어 단어 외우기에 더 매달렸다. 학창시절 3M 주황색 귀마개를 오래 끼다보니 귀에 진물이 나오기도 했다. 지금 이어폰을 끼고 이동하는 일이 무척 드문 원인이 이 때 생겼다. 어쨌든 특별한 선택지가 보이지 않으니, 일단 손에 잡히는 것을 놓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두가 단순한 용돈벌이로 알바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반복된 좌절, 가정 폭력, 조부모 부양, 가족간병 등 불가피한 사정 속에서 이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만 그런 속사정은 본인이 먼저 꺼내지 않는다. 우리도 이런 성장 배경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세수를 안했으면 있는 제발 좀 씻고 다녀라, 머리가 길면 좀 자르고 다녀라 등 그냥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본다.


누구도 서로의 선택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았다. 택배를 뛰든, 캐드를 그리든. 그게 우리 서로를 지켜나갈 수 있었던 암묵적인 룰이었다. 친구들은 경쟁자도 아니었다. 각자 주어진 조건 속에서 허우적대거나 체념하는 날도 있었지만, ‘공고 사회’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나갔다.


비록 공고에 입학하기 전까진 '자발적 선택'을 많이 해보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나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성숙한 주체인 성인이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찾아나가는 의미있는 '몸짓'이었던 것이다.


Deep Dive


* 열악한 근무 환경과 적절하지 못한 급여를 제공하는 악덕 중소기업을 비하하는 은어로 쓰인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선 중소기업은 모두 나쁘다는 의식이 만연하였다. 중소기업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와 이를 은폐하려는 분위기 때문에 생긴 의식도 한몫하지만, 의외로 학교에서 중소기업을 장려하지 않는 구조적 문제도 한몫한다. 이 부분은 다음 차수에 논해볼 예정이다.


작가의 이전글공고(工高)를 공고(公告)합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