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자축구 팬이다. 여자축구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걸 넘어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 편이다. 여행은 싫어하지만 당신들이 있는 곳은 어디라도 따라가고 싶다. 경기 표를 가장 먼저 샀다. 그게 여행준비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월드컵을 보려고 나는 호주로 떠나게 되었다.
2023. 7. 22.
평택에 왔다. 비는 매섭게 내리고 석희는 기차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열차 승강장에 바로 서서 내가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 오는데 뭐 하러 마중을 나와, 알아서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엄마 같은 말이 그냥 튀어나왔다. 마중하러 먼 길 오는 그 정성에 미안했다. 요즘은 누군가한테서 정성이나 마음을 받는 게 어렵다. 왜 나한테 마음을 쏟는 걸까, 의문도 들고 다시 내가 갚아줘야 하는 부담이 생겼나 보다. 그동안 많이 받아왔는데 나는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이제야 든 이유도 있다. 나한테 함부로 잘해주지마요들. 이 할미는 잘 까먹어서 당신이 바라는 만큼 못해준단 말이야.
'너도 내가 놀러 가면 기차역까지 데리러 와주잖아. 나도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하다고 말하는 너.
아이고, 내가 데리러 가는 이유는 나는 운전하길 좋아하고 역에서 우리 집까지 대중교통으로 오기엔 힘들어서 그러는 거요.
이랬다가 혼났다. 음, 석희라면 마중을 당연하게 갈 거 같긴 하다.
저녁에는 곱창전골을 먹으러 갔다. 내 인생 첫 곱창전골, 무난했다! 항상 내가 먹고 싶은 걸 먼저 물어봐주는 석희. 나는 예민한 입맛이다. 음식을 굉장히 가려 먹는 편이라 좋아하는 것만 먹고 아닌 건 절대 안 먹는다. 요즘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그리 만족스럽거나 짜증나진 않는다. 먹을 걸 깊이 생각하는 게 귀찮아졌기 때문일까. 그런데 석희는 내기 분을 면밀하게 살핀다. 입에 맞는지 배부르게 먹었는지 한 번씩 물어봐준다.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보나. 석희 덕분에 나는 과분한 관심과 환대 속에 하루를 보냈다.
석희를 두고 할 말이 많다. 이 친구 덕분에 내가 새로운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대학 교류전 배드민턴 대회에서 만났다. 대회가 거의 끝나갈 즈음 화장실에서 나는 친한 선배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는 한 경기를 빼고 모두 이겼기에 내 자랑을 실컷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는 어디선가 나와서 내 이야기에 맞장구 쳐줬다. 처음 본 사람이 나보고 '맞아요! 진짜 잘하세요!'라고 칭찬을 해주니 놀라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작년 경기도 인상적이었다며 반가워 해주는게 고마웠다. 그리고 이번 경기의 상대였던 석희와 연락처를 나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석희는 경기가 끝난 후 악수를 나눌 때 '정말 잘하세요.'라고 인사를 더했다.
경쟁을 해야 하는 상대편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다니? 체육 대회를 수없이 나가며 부담과 적대만 가득했던 나는 석희를 만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회에 감사하게 되었다. 단순히 승부를 내는 걸로 그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모습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또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그런 자리. 석희가 내 생각을 바꿔줬다.
축구도 여러 이유들로 지쳐 이제는 그만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석희는 자기는 축구도 한다고, 우리 한 번 더 대회에서 만나자고 한다. 석희를 대회에서 다시 만나볼 기대로 축구 대회를 한번 더 나갔다. 운명의 장난으로 석희는 대회에 못 나오게 되었지만 나는 그날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만났다. 축구와 뒤늦게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날 후로 나는 축구만 생각하면 뭐든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렇다. 이 거대한 사랑의 시작인 석희와의 만남을 이번 여행의 시작으로 삼았다.
삼식이는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는데 석희는 삼식이를 책임졌다. 아침부터 식사를 예쁘게 만들어줬다. 평소에 아침도 잘 안 챙겨 먹는다는 사람이 부지런히 식사를 차린다. 전에 유부초밥을 친구에게 한번 만들어서 대접했다가 만들기가 생각보다 어려워서 식겁했던 나는 또 한 번 고마움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직접 만든 그릭요거트도 쫀득하니 신기한 식감이었다. 아몬드도 좋아. 꿀도 뿌려주는 센스 좋아. 계란 두 개 구워서 하트 만들어 준 것도 좋아.
호주의 날씨가 겨울인 건 알고 있었는데 전날 급히 출발하느라 패딩을 못 챙겼다. 그래서 오후에 서울에 가서 패딩을 하나 사려고 했는데 석희가 자기 가지고 있던 패딩을 하나 주었다. 이 고마운 마음을 어찌 갚을까. 석희는 좋은 말에 따뜻한 마음도 가득 준다. 심지어 가진 물건도 스스럼없이 내어주는데 나는 받기만 하는 친구라서 미안했다.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뒤섞인 채, 든든한 배로 기분좋게 인천 국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