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 달 살기 - 열사흘 째

태풍이 갔다더니, 이제 시작한 것 같은 태풍.

by 정희라

오늘 아침 9시 비행기로 남편이 떠났다.

아침 일찍 애들을 깨워 남편 배웅에 나선 길.

떠나는 남편님, 지나치게 해맑아 보이십니다.

떠나는 날까지 쨍한 날이 없네....


제주 공항... 이건 영화에 나올법한 애틋한 장면인데?




애들 아빠 배웅하고 집에 돌아와 한 숨 잤다.


회사일이 갑자기 복잡해져서 마음이 심란한 남편.

가족들과 만나 재미있는 가족여행을 잔뜩 기대하고 제주에 왔는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실망한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남편은 괜찮다 하는데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얼굴.)


남편은 둘째치고

내가 남편이 와 있는 동안 온 가족이 함께 재미있고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제주 여행 오기 전 남편의 '아빠 파업, 남편 파업'.... 좀 흐지부지 끝나 버린 것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헤어지고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나면

아이들도 남편도 나도 가족의 부재 이후에 느꼈던 빈자리를 채우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거나,

헤어져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았거나,

우리 가족들의 적응력이 뛰어나거나,

서로 굉장히 독립적이거나.

암튼 기대했던 효과는 별로 없었다.


남편이 와 있는 동안

아이들은 집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남편은 화가 나 보였고,

나는 그런 남편을 보며 안절부절못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와서는

명절에 손님 치른 것 마냥 피곤하고 졸음이 쏟아졌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좀 슬프다.

남편도 안 됐고, 아이들도 안 됐고, 나도 안 됐다.


남편은 복잡한 회사일을 떠나 가족들에게 위로받고 싶었을 수 도 있고,

집과 학교를 잠시 떠난 아이들이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제주의 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뿌듯함을 느끼고 싶었을 수 도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유롭게 티브이를 선택하고 싶었을 수 도 있고,

진짜로 아프고 피곤하니 휴식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나는 남편도 보살피고 싶었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 친밀한 시간을 보내며 정서적인 안정감 느끼고 싶었던 것일 수 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가족 모두가 만족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갈등하고 속상했던 것인가 보다.


솔직하게 마음을 터 놓고 의논하다 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에구 내가 참지.. 하며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네!


우리는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고

부탁할 수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남편이 집으로 돌아가고 한 숨 자고 나니 뒤늦게 생각나서 참 아쉽고 안타깝다!


이 뒷북 공부는 언제 현장감이 생기려나...

타임머신을 개발하는 것이 빠를까??




한 숨 자는 동안

아이들은 마당에서 호스로 물을 뿌리며 물총 싸움을 했다며 젖은 옷을 널어놓았네.

형제님들 스케일도 크시지!

어쩐지 안 깨우더라니.


배고픈 아드님들이 냉장고를 뒤져 김밥 재료를 찾아낸다. 쌀을 씻어 야무지게 밥도 해 놓았다!

그 덕에 오늘 점심은 김밥.


오른손 검지에 깁스를 한 나는 최소한의 도움만 주고, 말로만 코치를 했는데도

아이들이 제법 모양을 갖춘 김밥을 만들어 내니 신통방통하다. (아들 자랑 맞다.)



태풍의 영향권은 벗어났다는 것 같았는데

태풍 때보다 더 심한 비바람에 도서관으로.

애들은 제주 도서관에서 만화 실컷 보고 가겠네.


형아들 책 읽는 동안 기다리기 지루한 막내는 1층에서 간식 먹기.

간식 먹기도 지루해 차에서 낮잠 자기.


형님들은 무려 4시간 동안이나 꼼짝 않고 만화에 초 집중.

만화책이 있어서 비 오는 제주도 즐겁구나!

다음엔 막내 놀잇감도 좀 챙겨 가야겠다.



나는 왜 동화책을 읽어주면 한 페이지에 한 번씩 하품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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