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만 입으면 눈이 자동으로 감겨
어제 하루는 예비군 훈련을 받고 왔다.
어제부로 이제 올해의 예비군 훈련은 다 끝났다는 점이 꽤나 홀가분하다.
요즘은 자소서를 쓰느라 거의 골방에 틀어박혀 있는게 일상이다 보니,
비록 예비군 훈련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활동적인 일을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내가 훈련에서 맡은 역할은 소대장이다.
작년에 전역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예비군 기동대장님으로 부터 소대장 영입 제의를 받았다.
소대장을 맡으면 추가 훈련 수당도 조금 나오고, 기존에 3일 해야하는 훈련을
전반기 한 번, 후반기 한 번 총 두 번만 받으면 된다고 했다.
애초에 나는 예비군 소대장이 장점이 많으므로 할 수 있으면 하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설득의 과정 없이 바로 할 생각이었지만,
쉬운 남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하고 장점을 좀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예비군 기동대 소대장이 되었다.
나는 포병 장교로 전역했기 때문에,
현역 시절에도 소대장을 해본 적이 없다.
(포병에는 '소대'라는 편제 자체가 없어서 '소대장'이라는 직책도 없다)
물론 5대기 소대장은 해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 직책이고, 관리 인원 수도 얼마 안되니
제대로된 소대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전포대장 대리 임무는 여러차례 해봤고, 소대 단위보다 훨씬 많은 인원들을 통제해서
비사격훈련까지 진행해봤기 때문에, 전시에 소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듯 싶었다.
아무튼, 예비군 소대장들은 남들은 한 시에 들어오는 훈련을
아침 9시부터 참석해야 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일찍 나와도 딱히 할 일은 없어서
의자에 앉아서 멍을 때리다가, 가져온 책 (자본론 공부)도 좀 읽고 시간을 때우는 데,
기동대장님이 우리에게 뭐라도 할 일을 줘야겠다 싶었는지, 중요 정보가 블라인드 처리된
임무수행카드를 읽어보라고 나누어 주셨다.
전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지 나와있었지만, 군사 보안때문에 구체적인 지형에 대한
정보 등이 죄다 지워져 있어 답답했다.
특히 포병 장교 출신으로서 화력 계획을 관심있게 살펴보았는데,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대목들이 좀 있었다.
(일단 6계단 좌표로 나와있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6계단이면 오차가 얼마나 커지는데!)
그냥 읽기만 하고 넘어가나 싶었더니, 뜬금없이 기동대장님의 퀴즈 타임이 시작됐다.
전시 상황에서의 소대장 임무에 대해 먼저 1소대장에게 질문하셨는데 (나는 2소대장)
그 분이 너무 일반론적인 답변만 하셨고, 기동대장님은 위의 리선권같은 표정으로 답답해 하셨다.
그러더니 나를 보시면서 "OO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하고 물으셨고,
내가 크게 분류된 두 가지의 임무를 각각 대답하자, 기동대장님은 정답이라며 무척 흡족해 하셨다.
비록 예비군 훈련에서 받은 칭찬이라도 칭찬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것이 내가 이번 훈련에서 유일하게 머리를 사용한 일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버스를 타고 작계지역을 도는 동안 차 안에서 정신없이
잤을 뿐이니까.
내 생각에는 전투복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상한 물질이 묻어 있는게 분명하다.
전투복만 입으면 평소보다 잠이 더 쏟아지고,
평소보다 배가 더 고파지니 말이다.
그래도 예비군에서 우연히 중학교 동창들을 몇 명 만나서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아직 마음만은 10대인데, 어느새 예비군 훈련을 받는 아저씨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뭔가 서글프지만, 내년부터는 학생 예비군으로 편입되어 대학교 새내기가 된 듯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만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