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순간

한강, '소년이 온다' 서평

by 쿠바노스


독서노트














소년이 온다저자한강출판창비발매2014.05.19.











1.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2024년 12월 3일은 거대한 국가적 폭력이 국민을 잠식할 뻔 했던 날이었다.


나는 그 날이 오기 전까지 계엄령이니, 내란이니 하는 것들이 역사책에나 나오는,


그래서 나의 실제적 삶과는 관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로 들어오고, 창문을 깨부수고 국회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그 말랑한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번 사태 전 마지막 계엄령은 1980년 5월 17일에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부터 약 열흘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란군에 맞서 민주 시민으로서의 저항권을 용감하게 행사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무참히 짓밟혀야 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잡혀서 고문을 당했다.


그런 엄청난 비극을 자양분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성장해왔다.








2.


나는 이렇게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과거의 비극이 현재를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이번 12.3 내란 사건을 목격하면서, 그리고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을 들으면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이 문구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


이번 사건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국회에서 보여주었던 용기와 단결력은 국회에 침입했던 군인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군인들에게 남아있던 양심의 한 조각들이 그들로 하여금 부당한 명령에 사보타주하게 했고,


그 사보타주가 모든 상황을 바꾸었다.


불행히도 45년 전 광주에서는 그렇지 못했지만, 거기서 겪었던 씻을수 없는 불행을 사람들이 처절하게 인식하고 학습했기 때문에


우리는 12월 3일의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소년이 온다'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책 두께는 얇았지만 읽는 과정이 매우 힘들것이라는 경고도 들었다.


하지만 죽은 자에게 구원받은 산 자의 일원으로서, 이 작품을 읽는 것은 의무와도 같았다.






3.


작품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장에서 각기 다른 서술자들의 시점으로 '5.18'이라는 하나의 비극을 조명한다.


한 명의 서술자가 이끌어가는 작품을 주로 접해왔던 나에게 이런 서술 방식은 사실 처음엔 낯설었다.


하지만 챕터 하나 씩을 넘어갈 수록 이 방식이 국가적 비극을 조명하는 데 있어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각 장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은 사실 이미 1장에서 다 등장한다.


친구 정대가 계엄군의 총에 맞는 걸 보면서도 두려워서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시민들의 시체 수습에 매진하는


16살 동호, 그와 함께하는 은숙, 선주, 진수.


그리고 6시까지만 있겠다는 동호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집에 돌아갔던 동호의 엄마까지.


이들이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시선과 감정은 마지막 순간에 내 마음속에서 재구성되고 종합되면서


하나의 어떤 응어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응어리를 토대로 다시 12.3 내란을 바라보는 것은 훨씬 더 깊은 통찰과 안도감을 동시에 주었다.


한 강 작가님이 젊은 시절 고민하셨다던 그 질문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에


이제는 당당히 "네!" 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4.


나는 역사 덕후로서,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현대사 덕후로서


5.18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렇지만 역사책의 건조한 텍스트를 읽는 것과 실제 사람들의 신음과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두 번을 거의 흐느끼면서 울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2장인 '검은 숨'이다.


이 챕터는 1장 주인공인 동호의 친구 정대의 영혼이 서술자다.


영혼의 관점에서 다른 시신들과 함께 창고에 짐짝처럼 쌓여 점점 부패해가는 자신의 시신을


동정했다가 때로는 증오했다가 하는 장면,


사건이 있기 전 행복하게 누렸던 일상, 하고싶었지만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절절했다.


그 절절한 내용을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과 적당한 거리감으로 묘사한다.


오히려 그 거리감이 비극의 정도를 증폭시키고, 마치 그 장면을 내가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심상을


만들어주어서 대단히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5.


우리는 국가적 비극을 접할 때 죽은 자의 비극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산 자의 비극도 그 못지 않다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목도한 경험이나 잔인한 고문의 휴우증으로


몸과 마음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지닌채 살아간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한강, '소년이 온다'










그들은 여생을 '장례식'처럼 살아간다.


마치 '방사능에 피폭된 것처럼', 방사성 물질이 몸 속 곳곳을 산산이 파괴시키는 것처럼


비극의 경험과 기억은 그들의 삶을 산산이 부숴버린다.


작품은 산 자의 삶에서 다른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는 비극과, 그 현재의 경험이 죽은 자에 대한 기억과 만나는 순간을


잔인할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닌데도 이 정도까지 극한으로 피해자들의 감정을


펼쳐낸다는 점이 대단했다.


이런 작품은 정말 평생을 바쳐도 한 권 쓸 수 있을까 말까한 작품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6.


다시 작품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서.


아직 12.3 내란 사태는 종결되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작은 성과만을 이루어냈을 뿐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남아있고, 내란의 피의자들은 하나도 그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는 정당한 결론이


나온다는 보장도 100%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80년 5월 광주는 24년 12월의 대한민국을 구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일시적으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지속되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내 마음 속 한 켠에는 아물지 않는 하나의 응어리가 생겼다.


비록 비극으로 인해 생긴 응어리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씨앗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함으로 불확실성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