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원, 꿈꾸는 인간
애초에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던 사람으로서,
고백하자면 막상 떠나려니까 힘들다.
물론, 모든 원자가 한때 별의 일부였다고들 한다.
어쩌면 나는 떠나는 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 영화 <가타카 Gattaca>,
원하던 우주로 떠나는 빈센트의 마지막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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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원래 별이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물들어 가는 하늘을 보며 지친 하루를 달래고, 곁에 아무도 없는 적적한 밤에 자꾸 달을 쳐다보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꿈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이유도 그렇다. 우리가 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나고 싶다.
사회에 소속되고 싶은 게 아니다. 한 번도 반문하지 못한 정체 모를 집단에 파묻히고 싶은 게 아니다. 부품처럼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존재로서 이 땅에 뿌리내리고 싶다. 이제 막 땅 위로 솟아난 새싹처럼, 백 년을 굳건히 버틴 나무처럼. 어엿한 내가 되고 싶고 오롯한 내가 되고 싶다. 쓸모 있고 싶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마음의 창을 맑게 닦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순수하게 손길을 내밀고 싶다. 더는 바라는 것 없이.
타인을 짓누르는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실은 연약한 아이처럼 품에 안겨 사랑 받고 싶다. 눈치 보지 않고 떼도 쓰고 토라져도 봤다가 애정으로 꽉 찬 가르침도 받고 싶다. 싸늘한 평가나 비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 줄 수 있는 시선이 받고 싶다. 받고만 싶은 게 아니라 사랑을 주고 싶다. 작은 들꽃을 보듯 적대가 아닌 사랑으로 바라봐 주고, 내가 이렇게나 풍족하게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마음껏 알리고 싶다. 부나 성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공허한 욕망에 자신을 잊고 끌려다녀 봤어도 진심으로 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다. 제대로 사랑하고 싶다. 부족함 없이 탁월하게.
실은 하나가 되고 싶다. 편을 가르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뺏고 뺏기는 게 아니라, 밀치고 때리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이 너고, 너의 잃어버린 일부가 나임을 느끼고 싶다. 이른 봄 아침에는 빗물로 떨어진 꽃잎 위를, 여름밤 풀잎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가을 새벽의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차디찬 겨울의 정오에 눈이 쌓인 길을 함께 걷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요일에는 하루를 내어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싶다. 자애롭게 내리쬐는 햇빛에, 잔잔하게 부는 바람에, 보드라운 동물의 털에, 따뜻한 온도로 데워진 살갗에 얼어붙은 정서와 눈물을 비비고 싶다. 꼭 가족, 친구, 연인일 필요는 없다. 누구든, 무엇이든 함께일 수 있다면. 하나가 되고 싶다. 하나가 되기만 한다면.
실은 하나가 되고 싶다. 고유한 색과 빛을 내는 하나의 존재가 되고 싶다. 왜 하는지도 모를 의무와 역할의 갑옷을 벗고, 무른 감상이나 딱딱한 관조도 내려 놓고, 다만 더 이상 쪼갤 수도 없이 단단한 알맹이 같은 주체적 의지를 발현하여 빛나고 싶은 것이다. 때론 힘차게 때로는 평온하게. 작든 크든 하나의 세계가 되고 싶다. 내가 변하지 않는 중심을 도는 하나의 세계라면 우월하고 열등한 것도, 좋고 나쁠 것도, 이기고 지는 것도 없다. 내 안에 태양이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공평하고 일관되게 내리쬐는 빛처럼 무엇이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단지 수많은 별들 중에 하나라면 작다고 괴로울 필요도 없다. 내가 되어 빛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알고 싶다. 내가 누군지, 왜 이 지구에 이런 기질과 모습으로 태어났는지. 태어남과 동시에 잊었던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다. 기억하고 싶다. 존재를 통째로 던져서라도 기억하고 싶다. 원망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질문하고 싶다. 내가 대체 누구입니까? 왜 태어났지요? 하늘 위에 쏟아지는 별들에게 열렬히 묻고 싶다. 왜 그렇게 어둠 속에서도 꿋꿋이 불을 밝히며 생명을 인도하는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조각난 세계의 신비를 발견하고 이어 붙이고 싶다. 그 아름다움을 기꺼이 누리고 싶다.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컴컴한 하늘이어도 별들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우주 안에서 숨쉬고 싶다. 숨을 쉬고 싶다! 간절하게 숨쉬고 싶다.
우리는 이야기하고 싶다. 억눌리고 치이고 입막음 당하는 것이 아니라 홍수처럼 통곡하고 산불처럼 분개하고 싶다. 실컷 이 세상을 웃으며 노닐고, 새처럼 날아다니고 싶다. 규칙과 혼란으로 벅적이는 도시뿐 아니라, 그 너머의 숭고한 산과 호기로운 절벽, 처절한 심해 위를. 시시각각 사시사철 변하는 풍경과 굽이치는 기류 속에 나를 내맡기며 한껏 기뻐하고 축하하고 싶다. 모두의 눈부신 탄생과 살아 있음을! 단지 끝나는 삶이 아니라 연결되고 또 연결되며 생명이 계속 이어지는 삶을! 죽음도 우리의 빛나려는 실천을 가로막을 수 없고 우리가 그렇게 영생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낌없이, 아쉬움 없이 주어진 모든 은총을 꺼내어, 지쳐 나에게 온 것들을 위해 헌신하고 물을 주며. 살아 있는 것이든 죽어 있는 것이든 동등하게. 고통도 사랑도 하나. 끝없이 흐르는 음악이 되어 넋을 위로하고 노래하고 싶다.
인간은 원래 별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집이 너무도 그립다. 그래서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