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장미 방] 르네 마그리트의 <중산모를 쓴 남자>(1964)
최초 작성일: 2021. 12. 07.
최종 수정일: 2022. 01. 26.
[안개 낀 장미 방]
마그리트 1. 전환의 힘
마그리트 2. 쌉싸름한 오렌지빛 강물 위에서
마그리트 3. 백일몽을 깨고, 미완-성(城)으로
마그리트 4. 밤낮의 경계, 선악의 저편
마그리트 5. 완벽주의의 벽을 뚫고
마그리트 6. 살짝 환기만 시켰을 뿐
이제 막 시작된 11월의 신선한 바람이 불던 토요일이었다. 방 안을 가만히 둘러보다가 책만 가득하고 이미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보라색 바탕에 선명한 주홍빛 꽃 사진이 프린트된 쭈글쭈글한 메모장은 예외. 그 위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문구를 쓰고 벽에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이미지를 분석하고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글을 쓰면서, 그렇게 이미지란 대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개인적인 공간 주변에는 이미지를 두지 않는 무심함이라니. 물론 종종 생각은 해 보았다. 그렇게 많은 순간을 그저 머릿속에 머물러 있다는 게 나의 자연스러운 기질이자 지긋한 한계다. 물리적인 공간에 나를 뒤덮는 생각들, 나를 사로잡는 이미지들을 쏟아 내야 한다. 커서가 깜빡이는 백지를 넘어.
방의 벽 색깔은 오븐에 살짝 구운 듯한 옅은 분홍빛이다. 살짝 윤기가 감도는 밤색 커튼, 붉은기가 예리하게 돋보이는 고동색 피아노와 함께 '안개 낀 장미(misty rose)'라 불리는 매혹적인 톤을 방 안에 불어넣는다. 이 침착하고 사랑스러운 벽에 무엇을 붙여야 할까? 이 사랑스럽지만 황량한 공간에 어떤 영혼을 불어넣어야 할까? 책꽂이에 꽂힌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1984)이 눈에 들어온다. 민음사에서 2011년에 출판한 버전인데 책 표지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중산모를 쓴 남자 L'Homme au Chapeau Melon(Man in a Bowler Hat)>(1964)인 게 마음에 들어서 단단한 겉표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구매했던 기억이 났다.
민음사는 세계 최초로 쿤데라 전집을 발간했고, 전집의 표지로는 마그리트의 작품들이 선정되었다. 단순명료한 형식과 대비되는 난해함이 자꾸만 눈길을 끄는 마그리트의 그림들. 이어서는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 Inside Magritte》(2020. 4. 29. ~ 9. 13.)에서 샀던 엽서들이 생각이 났다. 서랍에 고이 모셔 둔 엽서들을 꺼내 방 이곳저곳에 이렇게도 대보고 저렇게도 대본다. 자와 사다리를 들고 돌아다니며 작품을 걸던 갤러리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가 되어 자유분방한 놀이에 심취한 느낌도 든다. 자그마한 엽서로 방을 어루만지는 소박한 동작 하나하나에 소소한 즐거움이 스며든다. 간만에 느껴 보는 즐거운 기분이다.
<중산모를 쓴 남자>는 방 입구 쪽의 좁다란 벽, 그것도 모서리에 꽤나 가깝게 붙였다. 이 이미지는 맞은편 화장대에 세워 둔 거울에 비친다. 방 안에 배치한 다른 마그리트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중산모를 쓴 남자> 아래에는 문득 떠오른 나만의 제목을 붙였다. 'The Power of Transition'.
'전환의 힘'. 힘은 인간이 드넓은 세상을 활보하며 스스로의 본성을 지켜 냄과 동시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연료이자 능력이다. 힘은 내가 주체적인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실천에 나서면서 가장 예의 주시하게 된 화두다. 어떻게 하면 넘어진 자리에서 더 쉽게 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애초에 덜 자주 넘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남아 있는 힘을 조금이라도 덜 소진시킬 수 있지? 어떻게 하면 힘을 더욱 늘려갈 수 있나? 이런 고민은 죽기 전까지 계속 이어지겠지.
힘에 관해 투철하게 고민하면서 힘을 기르고 실행해 나가는 데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스스로의 한계 혹은 약점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으면서 매우 유용한 방식은 바로 나의 현 상태를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거부에서 인정으로, 무시에서 존중으로, 혐오에서 사랑으로, 고집에서 유연함으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억압에서 자유로. 너무 거창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다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장대한 덩어리들을 구체적인 행위의 단위로 쪼개면 된다. 무겁게 짓눌린 몸에서 가벼운 이불 정리로, 어두운 방 안의 off에서 빛나는 조명의 on으로, 집 안에서 밖으로, 꾸벅대는 졸음에서 사뿐한 걷기로, 요동치는 불안에서 따뜻한 차 한 모금이나 다이어리에 계획 끄적이기로, 복잡한 생각에서 몇 가지 단어로, 몇 가지 키워드로, 몇 가닥의 문장들로. 또 그렇게 차근차근 완성된 글에서 하나의 건실한 말, 하나의 꾸준한 행동으로. 이 모든 선택지의 방향은 나약함에서 힘으로 흐른다.
가장 이상적인 전환은 재빠르고 확실하게 이루어진다. 어려울 것 같아도 전환의 실행을 위해서는 늦장 부리는 잡다함 없이 깔끔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엄지와 중지를 튕기며 탁 소리가 나는 순간, 카메라가 찰칵하며 피사체를 찍는 바로 그 순간에. 혹은 흰 비둘기가 중산모를 쓴 남자의 얼굴을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처럼. 전환의 속도는 힘의 강도에 비례한다. 빠르게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힘이 부족하다면 전환은 늦추어진다. 잠으로 무겁게 짓눌린 몸을 가벼운 이불 정리로, 꾸벅대는 졸음에서 사뿐한 걷기로 전환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어려워진다. 목표로 설정해 둔 전환이 지연될수록 비어 있는 얼굴에서 오는 깊숙한 공허, 그 허탈감이 주는 괴로움은 증폭된다. 주변은 차갑고 견고한 벽면으로 둘러싸인다. 부단한 노력 끝에 빠른 전환의 기쁨을 이따금씩 맛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느린 전환의 질퍽거림에 허덕이는 중이다.
변화를 갈구하지만 마음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는 전환이 괴롭다면, 전환의 과정 안에서 잠시 머무르는 것이 필요하다. 굳이 스스로의 멱살을 잡고 억지스럽게 나아갔다간 전환하기를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로 탈진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전환이 수동적으로 지연되는 것, 그리고 능동적으로 전환이라는 관념이나 경험을 충분히 음미하는 일은 얼핏 보기에 유사할 수 있지만 명확히 다른 문제다. A에서 B를 향한 전환 속에서 미세하게 조금씩 변주하는 나의 심장 박동과 숨소리, 내면의 (불협)화음을 천천히 느껴 본다. 그리고 되물어 보는 것이다. 나에게 이 전환이 정말 필요한 전환인가? A의 가치를 꼭 B의 가치로 바꿔야만 하는가? 생각보다 A라는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B라는 상태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B를 향해 몇 발자국 더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면 이어서 상상해 본다. B의 가치가 나에게 가져다 줄 무수히 많은 기회들과 새로운 세계를. 이미 이 과정 안에 무수히 많은 전환들이 들어차 있음을 깨닫는다. 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혹은 경쾌한 마음으로 다시금 전환의 여정을 떠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제처럼 <중절모를 쓴 남자> 역시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이 갖는 역설과 중첩을 논한다. 형식적이고 경직된 증명사진과 같은 중절모-남자의 무거운 이미지에 비둘기의 가벼운 날갯짓이 개입되면서 닫힌 벽 같던 배경은 어느새 열린 하늘이 된다. 이와 함께 중절모-남자의 얼굴 역시 다채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린다. 전환을 지연시키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얼굴의 블랙홀에 수동적으로 빨려 들어갈지, 그 순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얼굴의 정체를 능동적으로 밝혀낼지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전환의 날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면 그것을 나의 속도로 끌어내리면 된다. 비둘기가 위로 뻗은 날개를 아래로 내리는 순간, 남자의 눈, 코, 입의 생김새는 어떨지, 그의 표정은 퍼뜩 놀란 모습일까? 아니면 놀라울 정도로 의연할까? 깊은 남색의 먹구름과 같은 상상과 기대가 부풀어오른다. 메마른 내면의 우물 바닥에 촉촉한 비가 내리며 힘을 구성하는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