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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 2.
쌉싸름한 오렌지빛 강물 위에서

[안개 낀 장미 방] 르네 마그리트의 <향수병>(1940)

by 유하



최초 작성일: 2021. 12. 27.

최종 수정일: 2022. 01. 26.



[안개 낀 장미 방]

마그리트 1. 전환의 힘

마그리트 2. 쌉싸름한 오렌지빛 강물 위에서

마그리트 3. 백일몽을 깨고, 미완-성()으로

마그리트 4. 밤낮의 경계, 선악의 저편

마그리트 5. 완벽주의의 벽을 뚫고

마그리트 6. 살짝 환기만 시켰을 뿐





살면서 집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미국의 오리건주로 갔을 때였다. 그 전까지 성남의 한 작은 동네에서 어린 인생의 대다수의 시간을 보냈던 나는 미국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동네 구석구석을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이, 그 오밀조밀하고 정겨운 풍경이 너무도 그리웠다. 어린 나에게, 그리고 작은 한국에 비해 미국은 너무도 광활했다. 미국에서 나는 주류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외국인이라는 열등감과 영어에 대한 완벽주의적인 강박 때문에 말을 자주 하지 않았고 한국에서와는 달리 친구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미국은 인종, 성, 개성 등 다양한 기준에서 상대방을 차별하지 않는 태도를 적극적으로 지향했지만 현실에서 동양인이자 외국인을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때로는 은밀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소외의 기운을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어린 아이에서 사춘기 소녀가 되어 가며 나는 새로운 문화와 언어뿐 아니라 고독, 우울, 공허라는 감정들을 배웠다. 이를 '고향'을 대상으로 두고 조합하면 향수병이 되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몇 년 후 이제야 미국이 좀 편안해졌다고 느꼈을 때 즈음,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인천 공항을 나오자마자 맞이한 풍경은 갑갑했고 탁한 공기에 숨이 턱 막혔다. 어느새 나는 오리건주의 광활한 공간적 여유와 맑은 공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국에 대한 이러한 외적 인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치열한 입시 경쟁에 입문하고 치이면서 심리적인 인상으로까지 침투했다. 집안의 분위기도 전과는 달리 여러 가지 이유와 갈등으로 점점 예민해지고 날이 서 갔다. 점차 가족보다는 친구가, 집보다는 물이 흐르고 나무가 굳건하게 지키는 공원이 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직 독립하지 못했고, 현재 이 지구상에는 내가 온 마음을 담아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한국에 돌아온지도 어느덧 15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분당과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어릴 적 살았던 성남의 작은 동네를 꿈에서 수도 없이 마주했고, 작년 겨울, 정말 오랜만에 그곳을 방문했다. 하지만 작은 동네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작았고, 내 기억 속 푸르고 환하기만 했던 동네는 허름한 잿빛에 짓눌려 있었다. 한마디로 내가 그토록 그리워 했던 그곳은 세월의 바람에 휩쓸려 가고 없었다. 단지 기억의 얄상한 뼈대와 잔뜩 뭉뚱그려지고 깨진 형상만이 자리했을 뿐이었다. 이후 나는 그곳에 대한 꿈을 거의 꾸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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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을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엽서 이미지로 장식해야겠다고 다짐한 그 날(「The Power of Transition」 참고.), <향수병 Le Mal du Pays (Homesickness)>(1940) 이미지를 집어 든 두 손은 고동색 피아노 위, 앤틱한 시계 옆에 멈췄다. 시곗바늘이 11시 59분에서 12시를 향해 가듯 이 위치를 향해 가던 손의 움직임도 망설임 없이 확고했다. 나는 <향수병> 엽서를 고상하게 팔다리를 구부린 시계 받침대의 끝자락에 살포시 놓았다. 그 모습이 마치 다리의 난간에 기대고 있는 검은 날개의 남자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피아노를 칠 때 느끼는 주된 나의 감정들이 시각적으로 살아난 것만 같다.



음악은 나에게 감정이고, 피아노는 내가 감정을 직접적이고 물리적으로 쏟아낼 수 있는 오브제다. 안에서 잔뜩 뒤엉키고 묵혀 둔 감정들이 정확한 음으로 손가락 끝에서 배출되는 쾌감은 상상 그 이상이다. 낯선 이국땅에서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거나 피아노를 치며 고독, 우울, 공허, 그리움이 파낸 가슴 속의 구멍들을 음악으로 채우기 시작했다.('에어팟 링거 맞고 일어나자 요'는 내 음악 플레이리스트 중 한 세트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R&B, 소울, 팝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음악 취향이 형성되었다. 이제 피아노를 칠 때는 이 엽서 이미지를 이따금씩 올려다 보겠지. 그리고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뭉클한 느낌에 사로잡힐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 <향수병 Le Mal du Pays>, 1940, 캔버스에 유채, 102 × 81 cm, 개인 소장.

오렌지색 안개 저편에 즐비하게 선 희미한 건물들을 배경으로, 검은 양복에 검은 날개를 단 남자가 칙칙한 다리 위에 서 있다. <중산모를 쓴 남자>(1964)를 포함해 얼굴이 가려지거나 없는 마그리트의 다른 많은 작품들처럼 <향수병>에서도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산모를 쓴 남자>에서는 새에 가려진 남자의 표정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운 반면,(「The Power of Transition」 참고.) <향수병>의 경우에는 비교적 수월하게 남자의 표정과 시선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검은 날개를 단 남자는 다리 아래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을 것이다. 강물에는 그가 잃어버린 것들이 그득하다. 강물이 흐르며 잃어버린 것들은 추억이 된다. 남자는 오렌지빛 하늘에 물들어 가며 잘게 빛나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오렌지 껍질을 씹듯 씁쓸한 맛을 표정에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쌉싸름한 오렌지빛 하늘'은 내 음악 플레이리스트 중 한 세트의 제목이기도 하다. 'Emotional Oranges'라는 미국의 R&B 팝 혼성 듀오에게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



검은 날개의 남자 뒤에 사자는 오렌지빛 하늘을 더욱 진하고 어둡게 변환시킨 색으로 칠해졌다. 남자의 날개만큼이나 사자의 존재는 그림에 이질적이고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도심의 다리 위에 사자 한 마리가 이렇게나 얌전한 자태로 앉아 있다니. 사자가 평온한 상태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보는 경험마저 평온한 것만은 아니다. 이 사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혹은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남자는 추억 속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일까? 사자는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 즉 무형의 오렌지빛 강물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하늘에 투영된 오렌지빛 강물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향수의 감정이라면, 사자는 향수를 일으키는 추억과 대상을 은유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몸을 기울여 유심히 보려 하지만, 언제나 한 발짝 뒤에 있어 실체를 알 수 없고 결코 눈을 마주칠 수 없는. 평화롭고 눈부신 기억임에도 그것의 부재가 불안을 자아내는.



오늘 오후 3시 40분에 정신과 예약이 있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도 내 얘기를 잘 하지 않는 내가 가장 사적인 이야기들을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펼쳐 보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잡은 아주 낯선 약속이다. 2021년이 지나가기 전에 오렌지빛 강물에 흘려보내고 싶은 기억과 감정들이 있다. 몇 시간을 다리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검은 날개를 휘저으며 그 위를 잠시 서성이다가, 마침내 훌쩍 떠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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