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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 3.
백일몽을 깨고, 미완-성(城)으로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1959)

by 유하



최초 작성일: 2021. 12. 30.

최종 수정일: 2022. 01. 25.



[안개 낀 장미 방]

마그리트 1. 전환의 힘

마그리트 2. 쌉싸름한 오렌지빛 강물 위에서

마그리트 3. 백일몽을 깨고, 미완-성()으로

마그리트 4. 밤낮의 경계, 선악의 저편

마그리트 5. 완벽주의의 벽을 뚫고

마그리트 6. 살짝 환기만 시켰을 뿐





꼭 잠을 자지 않아도 꿈을 꿀 수 있다. 두 눈을 뜬 채로 대낮에 꾸는 꿈, '백일몽'.



2년 전쯤, 첫 직장이었던 갤러리를 그만두고 미루고 미루던 작가와 이야기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좇기 시작했다. 점차 서른이라는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인생은 짧게 느껴졌고,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오랜 꿈과 주체적인 선택을 향해 보다 매섭게 달리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나만의 본성과 스스로의 의지로 충만한 삶을 살리라는 크나큰 포부를 가슴에 담고 인생의 제2막을 열었다. 그러나 열정은 언제나 그 뜨거운 시작과 같은 강도로 활활 타오르지 않는다. 때때로 지나가는 바람에 약해지거나 허무하게 폭삭 꺼지기도 한다. 이제야 진정한 나의 길을 찾았다고 감격하던 제2막의 오프닝과는 달리 나는 점점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숲으로 들어갔고, 고립되었고 헤맸으며,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다.



무모하지만 용감하게 시작한 프리랜서 작가로서의 길이 백일몽과 같았던 지난 시간들과는 정말 다르기를 바랐는데, 아직도 그 연장선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하는 요즘이다. 아무리 글을 쓰는 데에 생각의 힘과 양이 중요하다지만 많은 시간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에 쓰기보다도 불필요한 불안과 걱정, 터무니없는 공상이 뒤섞인 생각과 상상의 홍수에 압도당했고,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서는 스스로를 몰아세우기 일쑤였다. 물론 과정을 잘게 나누어 보면 '불필요한 불안과 걱정, 터무니없는 공상'은 내면을 한 층 더 깊이 있게 성장시켰고 이를 통해 분명 의미 있는 변화들이 생성되었지만, 결과적인 측면에서 백일몽을 현실로 전환시키는 일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내 방의 베이지색 책상 옆에는 같은 브랜드와 색상의 책장 하나가 있다. 용산으로 이사 오기 전의 방은 베란다와 연결되어 있어서 책장 두 개를 넉넉히 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 방은 하나의 책장만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책들만 한 개의 책장에 꾹꾹 담아 가져와야 했다. 그렇게 생존한 좀 더 나은 컨디션의 책장과 책들은 이제 새로운 둥지 안, 책상의 오른쪽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이 다부진 책장의 왼쪽 옆면에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피레네의 성 Le Château des Pyrénées(The Castle of the Pyrenees)>(1959) 엽서 이미지를 붙였다. 책상에 올라가 팔을 뻗어 높이높이 붙였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 있거나 일어서서 이 이미지를 바라보았을 때, 시선의 위쪽에서 그림 속 거대한 바위 성의 동동 떠 있는 느낌이 한껏 발산되도록.



'피레네의 성'이라는 작품의 제목은 프랑스에서 '백일몽'을 표현할 때 쓰는 관용어인 ‘허공 위의 성’을 변형시킨 것이다. 거대한 바위가 같은 재질로 건축된 성을 머리 꼭대기에 왕관처럼 쓰고 넘실대는 파도와 푸르른 하늘 위를 부유하는 이 풍경은 초현실적인 위엄을 발산하며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성 ハウルの動く城 (Howl's Moving Castle)>(2004)을 비롯해 이후의 많은 예술 작품과 현대 사회에서 활용되는 다양한 이미지들에 영감을 주었다. 나는 이 바위 성이 백일몽 속에 등장하는 어떤 '이상'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완벽한' 이상을 구현했다고 보기에는 어딘가 엉성하다. 마치 예비 조각가가 야심을 품고 살짝 건드렸다가 돌의 막대한 크기를 버티지 못하고 포기해 버린 미완성작이거나, 좀 더 전문적인 예술가의 경우라면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한 조각같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Le Château des Pyrénées>, 1959, 캔버스에 유채, 200.3 × 130.3 cm, 이스라엘 미술관.



만약 꿈을 본격적으로 쫓기 이전의 제1막의 백일몽과 현재의 백일몽에 차이가 있다면, '이상'을 상징하는 이 바위가 완벽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제1막의 백일몽에서 나는 아주 먼 거리에서 바위의 꼭대기에 있는 성만을 발견했고, 다듬어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보지 못했다. 대신 나머지 부분이 현란한 형태로 성 전체를 완전하게 구성할 것이라 상상했으며, 계속 걷다 보면 이 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제2막에서 나는 바다의 위, 그리고 성의 꼭대기 아래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미완성의 부분을 마주하게 되었다.


"Shit."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했던 '현재의 백일몽'을 '현재의 백일몽적인 현실'로 수정한다. '금이 간 백일몽'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나는 아주 백일몽스럽지만 고단한 현실 속의 꿈과 이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공중에 정지되어 있는 바위의 상태는 그래도 이만큼 왔고 자율성의 달콤한 맛도 봤으니 완전히 포기하지도, 그렇다고 빠른 속도로 정주행하지도 못하는 미숙한 이상주의자의 애매한 위치,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세상을 예민하게 감각해야 하는 예술가의 양면적인 역할과도 매우 흡사하다. 언젠가 저 바위가 거창하게 물을 튀기며 지면에 착륙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목이 빠져라 기다릴 수는 없다. 파도와 바위 사이에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사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리고 망치로 나머지 부분을 하루하루 부단히 조각해야 한다. 꿈과 자유에 대한 무게가 이렇게 비대할 줄이야.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 파도의 한적한 소리에 맞춰 불안하게 내쉬던 숨을 천천히 호흡해 본다.



"그래도 부유하는 저 바위, 멋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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