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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 4.
밤낮의 경계, 선악의 저편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54)

by 유하



최초 작성일: 2022. 01. 25.

최종 수정일: 2022. 01. 27.



[안개 낀 장미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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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내 마음을 지배해 오던 풍경을 찾았다. 지친 시선을 잠시 누일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하지만, 알 수 없는 어딘가에 깊은 불안이 잠재되어 있는 풍경.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L'Empire des lumières>, 1954, 캔버스에 유채, 146 × 114cm, 마그리트 미술관, 브뤼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빛의 제국 L'Empire des lumières (The Empire of Light)> 연작 중 하나인 1954년 작품. 흰 뭉게구름이 떠 있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새까만 나무와 집이 얌전히 서 있다. 화창한 하늘 아래에 깔린 어둠 속에서는 불이 켜진 방의 창문과 집 앞의 가로등만이 유유히 빛을 발하고 있다. 이렇게 밝은 낮의 세계는 위에서, 캄캄한 밤의 세계는 아래에서 서로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의 오묘한 정경으로 매끈하게 합성되어 있다. 그림의 하단에 흐르는 강물은 밤의 세계가 머금고 있는 간소하지만 단단한 빛들을 잘게 흩뜨리며 정적인 화면에 미세한 생동감을 더한다.



그림의 제목은 '빛의 영토(The Dominion of Light)'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빛에 대한 권위적인 통치자의 유무에 따른 것인데, 통치자의 존재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빛의 제국' 대신 그 존재감이 완화된 '빛의 영토'라는 제목이 이따금씩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림에서 과연 지배자는 존재하는지, 이 묘한 풍경이 그의 위력에 의해 통치되는 영역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가만히 작품을 들여다보니 빛이 누군가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낮의 빛은 낮의 세계에, 밤의 빛은 밤의 세계에 고여 있을 뿐, 서로에게 흘러들어 가지 않는다. 맑은 하늘과 까만 나뭇잎들을 가르는 경계선은 예민한 정도로 선명하다. 묽은 계란 프라이 같은 가로등의 불빛도, 직사각형 창문 안의 불빛도 일정한 영역을 지키며 다른 구역을 침범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림 속 공간은 어떤 의도로 비밀스럽게 꾸며진 무대나 어떤 권위자에 의해 빛이 선정되고 철저하게 관리되는 '제국'에 가깝게 느껴진다.





나는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엽서 이미지를 벽면에 딱 붙인 책상 위, 더 자세히 말하면 책상의 사각형 둘레에 따라 부착된 난간 위에 놓았다. 그래서 이 이미지는 벽면에 붙인 다른 대다수의 엽서들처럼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 아니라 지면에 차분히 정착한 느낌을 준다.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무언가를 읽고 쓰다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할 때 머뭇거리는 시선을 두기에 편안한 위치다. 엽서 가까이에는 고등학교 친구가 선물로 주었던 머그컵이 있는데, 연필, 펜, 가위, 자 등 각종 문구류를 넣는 통으로 쓰고 있다. 컵에 그려진, 살짝 명도가 낮은 푸르른 하늘과 바다와도 얼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글 쓰는 작업을 하게 되면서 생각보다 나의 내면이 단단하지 않음을, 생각보다 내가 나 자신과 잘 지내고 있지 못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작업에 치명적인 방해물임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유내강'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인데, 사실 난 '내강'이 아닌 단지 '외유'보다 조금 덜 부드러운 '내유'였던 게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무언가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전에는 회피하거나 보다 담담하게 대면하지 못했던 상처와 나약하고 불안정한 모습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직시해야만 했다. 이 쉽지 않은 변화에 대한 본격적인 노력이 '일을 잘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내가 일에 너무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애정과 의지로 충만한 꿈을 실행에 옮기면서 자연스레 찾아온 긍정적인 변화들이니 뿌듯함도 있다. 무엇보다 나에게 '일'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닌,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귀중한 영역이다. 존재는 시간과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웠는지로 구성된다. 나는 '일'이 한 명의 '괜찮은 인간'으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좋은 인생'을 위해 시간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일과 자신의 삶 혹은 정체성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사실 정신적인 나약함과 관련된 문제를 제대로 의식하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필요성을 느꼈는지, 정신분석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 이어 이미 꽤 오래전부터 자존감과 정신 건강에 관련된 심리학 정보들을 되는대로 습득하던 중이었다. 요즘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콘텐츠가 상담이나 정신 의학과 관련된 것이 많아 가볍게라도 접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고, 적잖이 위로를 받았다. 그와 함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Human, All Too Human)』(1878)이나 『선악의 저편 Jenseits von Gut und Böse: Vorspiel einer Philosophie der Zukunft(Beyond Good and Evil: Prelude to a Philosophy of the Future)』(1886)과 같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철학서들도 사고의 수많은 오류를 고치고 내면의 힘을 기르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중요하게 여길 정신 건강의 회복과 유지를 저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죄책감'이었다. 나의 정신은 시종일관 내가 나로서 괜찮지 않고, 잘못된 인생을 살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다. 알게 모르게 스스로에게 부과한 과도한 자책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 강점보다는 무엇이 부족한지를 깐깐하게 따지며 충분히 잘 살아왔고 잘하고 있다는 확신을 앗아갔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가 '자유정신'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너뜨리려고 했던 편협하고 비합리적인 선악의 기준은 내 안에 너무나도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기준을 정하고 매 순간 들이밀었던 것은 나의 '초자아(Superego)'였다. '초자아'는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학에서 원초아(id), 자아(ego)와 더불어 정신을 구성하는 하나의 체계로, 본능을 억제하고 부모와 사회로부터 습득한 규범에 따른 이상과 도덕을 추구한다. 내 머릿속 꼬장꼬장한 판사가 가하는 혹독한 채찍질은 작업의 신속하고 탄탄한 진행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보다 눈앞에 놓인 글에 대한 온전한 몰두와 다음 단계로의 도약에 자꾸만 제동을 걸었다.



그렇게 '초자아'는 내 마음속에 '빛의 지배자'와 같은 역할을 하며 <빛의 제국>과 같은 풍경을 그렸다. 환하게 빛나는 선과 어둠에 잠긴 악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림 말이다. 밤낮 혹은 선악 사이의 선명한 경계는 진실을 가린다. 밝은 낮은 점차 어두운 밤이 되고, 달이 저물면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초자아가 지명하는 선과 악에 대한 관념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과 관점, 필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유연한 진실을. 이러한 기만으로부터 불안이 발생한다. 즉, <빛의 제국>에 펼쳐진 광경이 풍기는 은밀한 불안함의 기운은 단지 낮의 하늘이 밝다는 사실이나 밤의 사물들이 어둡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명확한 경계선을 그리며 병치되어 있다는 점, 두 세계를 나누려는 억압적이고 강박적인 기준 자체에 있다. 이는 모순된 두 영역이 함께 능동적인 조화를 이루며 존재한다는 의미의 공존이라기보다는 그저 각자의 위치에 고집스럽게 나란히 서 있는 '병립'에 가깝다. 주변 사람들에게 밝은 대낮의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했던 지난 나의 과거 역시, 어둡고 울적한 모습은 '나쁜 것'이며, 따라서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기만적 사고에 기초한다.



그렇다고 해서 <빛의 제국>이 묘사하는 광경을 단순히 '기만'이나 '악'으로 섣불리 규정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다시 한번, 선악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진리는 단지 '선'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형태와 해석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에 더해, 어떤 진실을 '기만하는' 것과 기만된 현실을 은근하게 폭로하며 그것을 매력적으로 '연출하는' 것은 한 끗 차이다. 다시 말해, <빛의 제국>은 기만을 다루고 있지만, 이를 통해 그것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후자에 가깝다. 작품에 그려진 낮과 밤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 자체는 기만적일 수 있지만,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나의 면면들을 이분하는 심리적 모순과 분열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 그림은 진실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니체가 말했듯, 존재의 근본적 가치는 우리가 흔히 '참된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보다 '기만'에서 더 잘 드러나기도 하며, 겉보기에 선악으로 대립되는 것 같은 요소들은 긴밀한 연관 속에서 통합된 본질을 형성한다.





참된 것, 진실한 것, 무아적인 것에 귀속될 수 있는 모든 가치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명을 위한 더 높고 근본적인 가치는 가상에, 기만에의 의지에, 이기심에, 욕망에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또한 저 훌륭하고 존중할 만한 사물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 바로 겉보기에 대립되는 저 나쁜 사물과 위험할 정도로 유사하고, 또 연관되어 있으며, 단단히 연계되어 있고, 어쩌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제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관하여 - #2」, 책세상, 2002, 17쪽.







다시, <빛의 제국>의 하단에 흐르는 강물에 집중하고자 한다. 겉보기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미세한 불안이 은근하게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꽤나 편하게 풍경 속에 머무를 수 있다. 불안에 맞서는 이 평온함의 비밀은 강물의 움직임에 있다. 위의 매끈하고도 견고한 집과 빛의 형태를 자잘하게 조각내고 뒤흔드는 강물이 없었다면, 시간과 형상의 유동성도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림은 더욱 차갑고 정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물은 푸른 하늘과의 병치로 자칫 부정당할 수 있는 어둠에 휩싸인 세계를 자신 안에 반영함으로써 그 존재에 대한 근거를 강화시킨다. 푸른 하늘이 아무리 환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경이며, 주된 형상은 방과 가로등의 불빛으로 어스름하게 발광하는 어둠이다.



이 같은 어둠에 대한 긍정과 시간의 실존으로부터 어떤 희망을 발견하고야 만다. 다소 불투명하긴 하지만, 그 희망은 이런 것이다. 흐르는 강물과 더불어 뒤의 푸른 하늘이 예고하듯 시간이 흘러 어둠에 묻힌 세상에도 밝은 낮이 찾아올 것이며, 고요한 어둠이 깔린 이 시간도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순간이라는 것. 밤낮이 병치된 풍경이 뿜어내는 오묘한 매력처럼, 기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선악의 팽팽한 대립 역시도 최선을 다해 살고자 했던 뜨거운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이 알쏭한 세계의 시간은 그저 모순 속에서 흘러가며 신비한 밤낮의 조합을 다채로이 만들어 내고, 그런 모순으로부터 존재의 파편들이 굳건히 연합되며 존재의 가치가 새롭게 정립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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