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 5.
완벽주의의 벽을 뚫고

르네 마그리트의 <관통된 시간>(1938)

by 유하



최초 작성일: 2022. 02. 03.

최종 수정일: 2022. 02. 05.



[안개 낀 장미 방]

마그리트 1. 전환의 힘

마그리트 2. 쌉싸름한 오렌지빛 강물 위에서

마그리트 3. 백일몽을 깨고, 미완-성()으로

마그리트 4. 밤낮의 경계, 선악의 저편

마그리트 5. 완벽주의의 벽을 뚫고

마그리트 6. 살짝 환기만 시켰을 뿐





요 며칠 간 예전 일기와 노트를 꺼내 읽었다. 요즘 정말 전에는 하지 않던 짓(일)들을 많이 벌리고 있다.





회전의자 위에 서서 균형을 잡으며, 때때로 까치발을 들기도 하며 옷장 맨 위에 있는 갖가지 색깔과 모양의 다이어리와 공책을 힘겹게 꺼냈다. 그리고는 한국에서 보낸 초등학교 시절과 미국에 갔던 시기, 한국에 돌아온 이후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시절로 나누어 옷장 바로 옆에 있는 피아노 뚜껑 위에 쭉 나열했다. 이사 혹은 대청소를 할 때나 보는 반가운 사물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치, 저 때는 저런 디자인의 다이어리가 유행이었지.'라는 생각에 이어 '참 꾸준히도 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책이든 영화든 과거에 보았던 것을 다시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처음에 느꼈던 재미와 신선도가 반감된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그 시간에 새로운 작품들을 찾아서 보는 게 좋다. 영화 뿐 아니라 내가 지나온 과거에 관해서도 그렇다. 현재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들과 미래의 꿈과 이상이 중요하지, 과거의 사건과 감정들을 상세히 곱씹거나 향수에 젖는 것을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때그때 기록을 해놓긴 해도 그것이 지나면 지난대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예술 작품도 그렇고 현재 이렇게 과거에 쓴 일기와 노트를 들춰 보는 이 낯선 상황도 그렇고, 나는 '재미없는' 과거를 의무적으로라도 곱씹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유는 둘 다 글을 위해서다. 예술 작품의 복기는 비평과, 나의 개인적인 과거를 끄집어내는 일은 현재 집필하고 있는 첫 소설과 연관이 있다.



마구잡이식 낙서와 반듯하게 정돈된 글씨를 넘나들며 종이에 짓이겨진 문자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니 잊고 있었던 질풍노도의 감정들과 흥미진진한 일화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에 더해, 지금은 내 안에서 많이 가라앉은 모습들, 반대로 이상할 만큼 꾸준히 유지되어 온 모습들도 보였다. 하나의 극에서 전혀 다른 극으로 치달은 변화도 보였다. "치...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를 남발하며 스스로에게 자아도취되었던 시절도 있었고, 자신을 모질게 깎아내리던 시기도 있었다.



과거의 경험은 이렇게 광범위한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의 말로 평가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흑역사'. 이불을 걷어 찰 만큼 부끄럽고 우스운 과거를 칭하는 말. 피식할 정도에 그치는 정도로 귀엽게 느껴지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낯부끄럽게 느껴지든 이 한 단어에 적합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쩌면 나는 단지 부끄러웠던 순간 뿐 아니라 나의 역사 그 자체를 '흑역사'로 규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과거는 언제나 그 자체로 암흑이었고, 딱히 기억이 나지도 않고 기억할 필요도 없는 영역이었다. 누군가가 후회되거나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냐고 물어보면 나는 그저 지금이 가장 좋다고 대답하곤 했다. 왜일까?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완벽주의'로 설명하고 싶다. 나의 정신과 삶은 이 '완벽주의'에 지긋하게 시달려 왔다. 과거의 기록에서도 그런 경향이 다분히 보이는 것이, 노트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거나 인생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아예 종이 자체를 찢어 낸 자국들도 빈번하게 보였다. 위에서 언급한 '이상할 만큼 꾸준히 유지되어 온 모습들'이란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행위와 소망은 '완벽한 나'와 '완벽한 삶'을 향해 있다. 나에게 과거는 이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발판이기도 하지만, 그저 발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밟고 나면 쓸모없어지는, 좀 더 완벽한 나의 모습과 점차 멀어지는, 그리고 멀어져야 마땅한 미숙한 면면들의 집합. 화려한 조명은 절대 그것을 비추면 안 된다. 좀 더 나은 모습인 현재 나의 가치를 현저히 떨어뜨리기 때문에.



르네 마그리트, <관통된 시간 La Durée poignardée>, 1938, 캔버스에 유채, 147 × 98.7 cm, 시카고 미술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관통된 시간 Time Transfixed (La Durée poignardée)>(1938)에서는 기차가 연기를 뿜어내며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 매끈하면서 견고한 회색 벽을 뚫고 지나가고 있다. 이 벽을 '완벽주의의 벽'으로 간주한다면, 그림에는 어떤 의미가 생성될까?


마그리트는 '관통된 시간(Time Transfixed)' 혹은 '고정된 시간'이나 '얼어붙은 시간'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영문 제목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불어 원제인 'La Durée poignardée'를 직역하면 '단검에 찔린 전진하는 시간(ongoing time stabbed by a dagger)'을 의미하는데, 이는 번역된 버전보다 훨씬 강렬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목처럼 마그리트는 벽난로 위의 시계보다도 더욱 역동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상징하는 기차를 단검으로 찔러 벽에 고정시킨 것처럼 표현했다. 그래서 그런지 기차는 빽빽한 연기를 흩날리며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벽에 끼어 '얼어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는 마치 그림에서처럼 앞으로 맹렬히 질주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완벽주의의 벽'에 끼여 꼼짝도 못하고 있는 기차와도 같다. 완벽주의적 사고방식은 '완벽한' 지점 그 자체에 집착한다. 때문에 더 나은 것을 향해 가는 과정과 그 과정 안에서의 세부적인 노력보다도 왜 현재 스스로 '완벽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는지를 질책하는 데에 집중한다. '완벽한' 지점이 갖는 시간은 과정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지 않고 하나의 좁은 우물 안에 고여 있다. 즉, 그러한 사고의 틀은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고정될 수 있는 사물처럼 인식하는 오류를 갖고 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지점이라는 것도, 고정된 시간이라는 것도 없는데 말이다.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 이미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완벽주의는 그런 불가능한 상태를 추구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면서 '고여 있는 시간'에 머무르는 역설을 드러낸다.



이렇게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겉보기에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거짓'을 그려내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숨겨진 '심리적인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좀 더 완벽주의를 이루는 '벽' 자체에 집중해 본다. 완벽주의가 그 의도와는 다른 '나쁜' 습관을 낳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생명력이 마구 불어넣는 불길로 뜨겁다. 즉, 완벽주의는 삶을 잘 살아내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렇다면 '완벽주의의 벽'을 뚫을 수 있는 힘은 이미 그 본질 안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완벽주의의 벽'을 이루는 비효율적인 습관들은 털어 내고, 기차가 단단한 벽을 뚫고 지나가는 마력에 상당하는 삶에 대한 열망만을 가슴 속에 남긴다. 더 나아가, 그 열망을 어떻게 좀 더 발전적이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구현할지를 고민하도록 한다.



마그리트는 <관통된 시간>을 작품의 소장자 에드워드 제임스(Edward James)의 집 계단 밑에 둠으로써 그림 속 기차가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손님들을 '찌르기를' 원했다. 마그리트가 선호했던 작품의 제목도 그렇고, 그는 이 작품이 관람자들에게 일종의 강력한 '체험'이 되기를 무척이나 바랐던 것 같다. 마그리트의 바람과는 달리, 제임스는 계단 밑 대신 벽난로 위에 전시했다. 나의 경우, <관통된 시간>의 엽서 이미지를 방 안의 피아노가 밀착되어 있는 벽에 배치했다. 이 벽은 피아노를 치거나, 많은 부담없이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책을 읽거나, 자그마한 양초를 키고 '불멍'을 하며 작업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다. 완벽주의를 무너뜨리는 <관통된 시간>의 의미가 적절히 버무려질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이미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 갈색 톤이 피아노의 붉은 고동색, 피아노 위에 놓인 마그리트의 다른 작품 이미지 <향수병 Le Mal du Pays (Homesickness)>(1940)의 쌉싸름한 오렌지색과도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향수병> 이미지에 관해서는 「쌉싸름한 오렌지빛 강물 위에서」 참고.)



하지만 사실 <관통된 시간>의 이미지를 꼭 이 위치에 붙여야 했던 가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는 피아노 위에 살짝 검게 물든 얼룩에 있다. <관통된 시간>의 이미지로 이 부분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몇 주 전, <관통된 시간>의 엽서 이미지는 약해진 접착력을 이기지 못하고 피아노 뒤로 떨어졌다. 자신의 위치를 굳세게 지키고 있는 피아노를 옮기기도 어렵고,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뭐 어때. 벽의 작은 얼룩 쯤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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