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의 <피의 음성>(1961)
최초 작성일: 2022. 2. 27.
최종 수정일: 2022. 3. 01.
[안개 낀 장미 방]
마그리트 1. 전환의 힘
마그리트 2. 쌉싸름한 오렌지빛 강물 위에서
마그리트 3. 백일몽을 깨고, 미완-성(城)으로
마그리트 4. 밤낮의 경계, 선악의 저편
마그리트 5. 완벽주의의 벽을 뚫고
마그리트 6. 살짝 환기만 시켰을 뿐
오늘 오후, 간만에 근처 공원에서 달렸다. 온도가 많이 올라가서 가볍게 입고 나갔다. 바람이 불면 조금 쌀쌀했지만 춥지는 않았다. 뛰면 추위와는 더더욱 멀어졌다. 어제는 2월 중 최악의 기분을 맛봤는데, 오늘은 조금 민망하게도 이번 한 달 중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2월의 얼마 남지 않은 나날들이 받쳐 주기만 한다면야 그렇다.
1월이 끝나갈 무렵, 고등학교 친구 레이를 만나러 분당에 갔었다.(분당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나에게는 분당에 사는 친구들이 많다.) 만나기 전부터 내가 너무도 먹고 싶어 했던 육회로 배를 적당히 채우고는 레이가 단골인 카페로 끌려갔다. 계산대 옆에 진열되어 있는 핫 초콜릿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자 레이가 특유의 시크한 말투로 말했다. "응, 그거 먹으러 온 거야." 핫 밀크티도 함께 시키고 몇 분 뒤, 나는 이 친구가 왜 그렇게 이곳에 와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는지 알게 되었다. 왼쪽에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오른쪽에는 휘핑크림으로 위풍당당하게 무장한 진한 갈색의 핫 초콜릿 케이크는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언제 그렇게 당당했냐는 듯 사르르 녹았고, 따뜻한 밀크티는 색감 만큼이나 곱디고운 맛과 향을 은은하게 발산했다. 레이가 슬픈 얼굴로 이 카페는 곧 문을 닫을 예정이라고 해서 나도 같이 사장님께 무릎을 꿇고 빌겠다고 했다.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나는 레이에게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을 전했다. 사실 최근까지 많이 힘들었다는, 뭐 그런. 레이는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고 하며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친구를 안심시켰다.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마저 나의 어두운 모습들을 철저히 숨기고 힘든 일들을 나 혼자서 감내했던 것 같다고, 너를 포함해서 이렇게 마음을 조금만 더 열고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살짝이라도 전했을 뿐인데 금세 괜찮아지더라고. 진실로 나는 아주 많이 회복이 된 상태였다. 그러자 레이가 다음으로 한 말이 나의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살짝 환기만 시켰을 뿐인데, 금세 괜찮아졌구나."
'환기'라는 단어가 내가 회복을 위해 이제까지 해 왔던 행동들, 그리고 현재 나의 마음의 상태를 통합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너무도 적절해서 나는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친구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나 혼자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며 끙끙대고 생사를 오갔던, 그토록 완벽한 제거를 위해 발악을 했던 심리적 문제들이 놀랍게도 타인에게 마음을 조금 열고 "살짝 환기만 시켰을 뿐인데" 반짝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감탄할 만한 느낌이 뒤에 따라왔다. 어떤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포근했다'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싶다. 초콜릿 케이크 때문인가…. 요 새초롬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느낌을 줄 수가 있다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애초에 내가 힘든 얘기를 잘 안 꺼냈으니까. 내가 잘못했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나의 마음을 정확한 표현으로 듣는 일. '치유'의 다른 이름이다.
'안개 낀 장미' 방,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보면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피의 음성 La voix du sang>(1961) 엽서 이미지가 있다. 키도 작은데 이거 천장에 붙이려고 침대 위에서 콩콩 뛰며 참 애썼다.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해석해 보려고 조사해 보면 모호한 답변만 해대는 이 얄미운 초현실주의 미술가들. 하지만 그렇기에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이 끼어들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이 많이 있다고도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글도 쓰면서 이런 자유분방한 이미지 에세이를 여섯 편째 즐겁게 쓸 수 있는 것이다. 전에 미술에 대한 글이라 하면 개인적인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논문이나 비평 형식에 맞춰 써 왔던지라 꽤나 신선한 경험이다. 정확히 '나'와 눈앞의 저 '대상'이 어떤 연결 고리를 맺을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 호기심에서 형성된 관계는 나와는 별개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때와는 전혀 색다른 체험, 예상보다 훨씬 높은 친밀도를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공부나 연구나 논평이나 그런 부담되는 일들 이전에, 일단 좀 친해지면 좋잖아.
지금 이 이미지는 미술관이 아닌, 나의 가장 개인적이고 아늑한 공간 안에 있다. 나는 서서 팔짱을 끼고 수많은 관객들 사이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어느 대가의 고귀한 작품을 한 구석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눈을 찌푸리는 것이 아닌, 침대 위에 누워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이런저런 잡생각도 하며 편안하게 천장 위의 엽서 이미지를 본다. 두꺼운 나무의 몸통에는 세 개의 문이 달려 있다. 그중 첫 번째 문은 살짝 열린 상태로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가리고 있고, 두 번째 문과 세 번째 문은 활짝 열려 있어 안의 사물인 흰 구와 불이 켜진 저택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두 번째 칸이다. 천장과 평행한 상태로 이 이미지를 올려다 보니 새의 알 같기도 하고 볼링공 같기도 한 흰 구가 열린 나무의 문 밖으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다. 이 동글동글한 것이 내 얼굴 위로 떨어지기 전에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날쌔게 잡아야 할 것이다. (꼭 그래야 할까? 몸을 굴려 옆으로 피해야 하나? 그리고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공은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자주 중앙에 가로로 긴 틈이 벌어진 방울로 그려진다. 종종 어린 시절 마그리트가 키우던 말들의 목에 달려 있던 방울들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불가사의한 물체는 사물의 본래 크기보다 확대하여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그리트의 주특기와 함께 사용되어 커다랗게 커진 몸으로 화면 속 공중을 지배하는 위력을 떨친다. 그러나 <피의 음성>에서는 틈이 없는 매끈한 구로 그려졌다. 이 구는 딸랑거리는 방울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 물체로서 방울의 미완성작 혹은 불량품 혹은 파격적인 변형인 것이다. 그런데 또 '피의 음성'이라는 제목에서는 어떤 소리를 암시한다. 나무는 자주 '혈통'에 대한 비유로 쓰인다. 살과 근육으로 덮여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 분명히 흐르고 있는 붉은 피, 나의 정신 속에 대대손손 이어져 온 특정 관습과 행동 양식, 인간 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일정한 사고의 틀, 나의 출생과 함께 깨어난 본성과 자질들. 신비로운 알은 이런 것들을 한 데로 뭉뚱그려 만든 내면의 모호한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소음을 거세당한 방울이 곧 낙하하며 외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상상해 보게 된다.
세상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 "살짝 환기만 시켰을 뿐"인 현재 나의 상태를 그린다면 꼭 이런 모습일 것만 같다. 파란 안개로 휩싸인, 언제 어디서 위협이 가해질지 모르는 위험하고 낯선 세상. 나는 그를 온전히 믿은 적이 없고, 그에게 오랫동안 철저히 보이고 싶은 모습만을 보이며 살아왔다. 내 안의 못난 불안과 고통, 상처들은 어둠으로 꼭꼭 감싼 채. 그런데 나란 존재는 사실 그런 야생적인 세상과 완벽히 단절될 수 없는 존재다. 나의 뿌리는 정확하게 이 새파란 세상 속에 단단히 박혀 있고, 심지어 그것의 양분을 빨아들이며 성장해 왔고 지금도 성장 중이다. 나는 내 안에 흐르는 피로 인간 사회와 또는 그 안의 특정 집단과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아주 개인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했던 불안, 고통, 상처들을 점차 타인에게 조금씩 내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러한 문제들이 세상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와 보편적인 연결 고리를 갖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절대 나 자신의 영역 내에서는 해결되거나 회복될 수 없었던 부분들이 타인의 아주 작은 친절과 고운 말씨, 잠깐의 스침에서 얻는 온기만으로도 복원되는 것을 경험했다. '피의 음성', 불온한 방울의 '소리 없는 아우성', 그것은 '치유'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조차 베일에 싸인 상흔들을 어딘가에 감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을 켜 놓고 손님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더불어, 관계를 밀고 당기며 나갈지 말지 간당간당한 상태로 있는 저 하얀 구와도 같다. 언젠가 이 알이 산산조각나며 세상과 불분명한 방식으로 뒤엉켜 있던 사고와 마음이 선명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과 타인은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고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환기시키는 법을 알고 있으니 나는 덜 어둡고, 덜 무겁고, 덜 오만하다. 다음에 지인이든 처음 본 사람이든 누구든 만나면,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분명 당신이 필요하다고. 나의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고. 물론 마음만 그런 것이고 부끄러우니까 속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대신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따스한 눈빛과 악수를 그에게 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