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두스 요하네스 블로메르스의 <행복한 가족>
[안개 꽃핀 방]
최근 서재에 있던 그림 엽서가 툭 떨어졌다. 분가하기 전, '안개 낀 장미 방'에서 연재했던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관통된 시간 Time Transfixed>(1938)이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소리는 들었지만 별 생각 없이 지나갔는데, 이후 엽서가 떨어지며 낸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안개 낀 장미 방'과 가장 흡사하게 꾸며진 서재. 피아노가 붙어 있는 벽에 배치된 <관통된 시간>. 이사 전에도 똑 떨어져서 피아노 뒤로 사라졌던 이 그림은 또다시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소한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새집에서의 그림 엽서 연재를 재개하라는 신호탄으로.
실은 나도 이사 온 이후로 잔뜩 벼르고 있었다고! 떨어진 엽서에게 그렇게 외치고 싶기도 했다. 또 그렇게 사라져 버린 엽서가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떨어진 엽서의 입장에서는 내가 부주의했다고 주장하고 싶을 수도 있다. (혼자 사니까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다. 원래 이상했는데 혼자 사니까 이상함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걸 수도 있지만, 쉿.) 집에 가구들을 배치한 직후 '안개 낀 장미 방'에서 소개했던 총 6장의 이미지들에 더해 미술 전시를 보고 구매한 엽서, 그리고 『좋은생각』이라는 잡지를 알게 되며 5월호와 함께 받은 그림 엽서 5장을 벽면 이곳저곳에 붙였다.
특히, 『좋은생각』에서 받은 엽서들은 그림 엽서를 모으던 중에 뜻하지 않게 받은 것들이라 선물처럼 느껴졌다. 편안함이 깃들어 있는 이미지들이 새집의 분위기와 산뜻하게 조화를 이뤘다. 이 집에 들어오는 선물들은 다 그런 식이다. 집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꼭 알고 들어온 애들처럼 안성맞춤이다. 쭉 함께 해 온 가구와 새로 산 가구들, 소중한 책, 엽서 이미지와 고마운 선물들로 집을 단장하면서 올해 중 가장 커다란 행복을 느꼈다.
전과는 다르다. 새집도 나도. 정리되지 않은 고민과 물건들로 복작거리고, 아프기도, 방황도 많이 했던 '안개 낀 장미 방'. 이제 안개는 걷히는 중이고, 내가 누릴 수 있는 공간은 넉넉하다. 이름 붙일 방도 여러 개다. 그중 침실을 '안개 꽃핀 방'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새집은 전체적으로 '화사한 회색빛'이다. 다소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가벼운 회색 톤에 흰색도 섞여 있어서 그런지 이보다 좋은 표현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나의 하루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침실에는 특별히 '안개'라는 이름이 각인되어야 한다. 불안과 걱정을 아늑함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곳. 실제로 '안개 낀 장미 방'에서 이사를 오며 그런 힘을 확인시켜 준 곳. 내 인생의 불투명한 요건들을 상징하는 '안개'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안개를 기억할 것이다. 새로운 나, 부단히 성장해 가는 나의 인생은 안개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고, 희뿌연 안개꽃처럼 피어났다.
소개할 엽서는 침실에서 베란다 가까이에 있는 벽면에 붙인 것으로, 석양 배경으로 인해 노랗게 물든 해변을 그리고 있다. 모래를 뿌리며 즐거워 하는 아기, 그런 아이와 놀아 주는 아빠. 그 사이에 열심히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엄마. 정다운 가족. 네덜란드 화가 베르나르두스 요하네스 블로메르스(Bernardus Johannes Blommers, 1845~1914)의 <행복한 가족 The Happy Family>이라는 작품이다. 낙관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대가족의 아버지였던 블로메르스는 가정의 안락함을 그림 속에 담아내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는 초기에 가족과 아이들이 등장하는 화창한 해변 장면을 많이 그렸다. 눈부신 단란함과 평화로움으로 가득한 그의 작품들은 네덜란드뿐 아니라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으로까지 인기가 뻗었다고 한다. 그림 속 모래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성실한 파도처럼, 바닷가의 시원한 바람처럼 넘실댄다. 이런 따스한 붓터치와 태양의 일정한 색감으로 통합시킨 풍경으로부터 화가가 두드러지게 표현한 것은 중앙에서 사랑스럽게 웃는 아기의 두 볼과 오동통한 발, 엄마의 등에 걸쳐 있는 의상의 체크 무늬다. 세 가족 너머로는 아이들이 활기차게 뛰놀며 바닷물과 동화된 햇볕에 스며드는 중이다.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 가족처럼 나도 엽서 이미지를 내가 마음에 두는 곳에 붙이고서 수시로 보고 감상하며 해석하는 것이 즐겁다. 아빠와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내가 하는 것은 이미지를 활용한 일종의 놀이다. 벽에 붙여 놓은 이미지들과 생활 속에서 익숙해지고, 그날그날의 감정을 넣었다가 뺐다가. 여러 사건들을 겪은 후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보이는. 오늘 아침에는 빨래 건조대의 노란 수건이 <행복한 가족>의 노란빛을 더욱 부각시켰고, 다가오는 가을과 더불어 노랗게 물든 나의 마음이 이 엽서 이미지에 응집되었다. 신비한 우연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충동적인 면도 있지만 완전히 충동적이지도 않다. 이 시간의 실체는 차곡차곡 일구어 낸 다채로운 변화와 사건과 배움들이 결합되며 진실된 의미를 발화하는 순간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나는 어젯밤 자기 전에 다이어리에 고이 써 놓은 '해야 할 일들'을 잠시 제쳐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마음이 동해야 진짜 예술이다.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에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급급했고, 나도 모르게 인정받을 만한 예술과 아닌 예술 사이에 위계를 두었던 것 같다. 미술관에 가서 어려운 전시 설명을 독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전문가의 기준에서 멋지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에게 마음을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훌륭한 시도다. 하지만 이제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을 향한 이런 작은 실천과 자연스러운 교감이 보다 가치 있게 느껴진다. 오롯이 나 한 명의 개인으로서 세상을 대면하며, 전에 배웠던 이론적 지식들이 나라는 통로를 거쳐 삶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의 희열과 생동감이란! 마치 갓 튀긴 혈기왕성한 팝콘을 맛보는 것 같다.
스스로를 다그치고 다치게 하는 성장보다는, 비가 오면 빗물을 흡수하고 해가 뜨면 햇살을 머금는 자연스러운 성장이 좋다. 드높은 이상보다는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적게 꾸준히 열중을 다하는 성장이 나에게는 알맞다. 그런 성장의 길을 걸을 때, 본연의 내가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꿈틀거리고 광대한 감사로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마음껏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는 공간. 나는 그것을 '집'이라 부른다. 오랫동안 집을 집이라 부르지 못했고, 가족을 진정 어린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 역시 나의 미숙함 안에서 마음을 닫고 살았던 시절. 마음이 닫히면 성장도 멈춘다. 내가 나 자신에게조차 숨 막히게 혹독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잘 이겨 내고 새로운 장소에 당도한 나는 홀로 있음에도 하나의 단단한 가정을 가꾸어 나가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나의 손을 잡아 주는 법을 배우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다른 누구 이전에 스스로를 내 삶의 가족이자 동반자로서 다정하게 대하는 일. 따스한 손을 내밀며 세상에 다가가는, 건실한 행복의 시작이다. 행복한 가족. 행복한 관계. 행복한 삶. 그것은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