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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꽃피 Aug 31. 2022

이유





가끔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다.


“왜 말을 안 하지?”


이유는 많다. 그 이유들은 명료한 하나의 단어로 귀결된다.

불신. 어차피 내 얘기에 관심 없을 테니까.





원래 그랬던 건 아니다. 어릴 때는 하루 종일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에 가서 재잘재잘 떠들기도 하고, 재미난 일이 생기면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얘기해 주려고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두기도 했다. 딱히 특별한 일이 없어도 괜찮았다. 상상력을 발휘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으니까. 이야기를 듣는 나만의 귀한 청중을 위해 기꺼이 각색이나 과장된 연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열정과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그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원한 적 없었지만, 삼십 대로 접어들기까지 관계로 인한 상처에 시달리며 이야기, 사람, 삶에 대한 나의 열정은 열병이 되어 갔다. 어느새 나는 주변인들에게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족에게는 “이기적으로 변한” 사람으로 남은 한편, 가족 모두와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도란도란 밥을 먹은 지도 오래다.





일하던 갤러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게 된 이유도 많다. 그 이유들 역시 명료한 하나의 단어로 귀결된다.

생존. 사람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환영과 이별의 인사를 동시에 하는 나무처럼 혼자 남아 썼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화려한 장소에 가는 대신 꿈을 꾸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대신 손상된 내면을 직시했고, 예술과 책, 글을 통해 영혼으로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하루하루 꿈과 현실 사이에서, 외로움 속에서 비틀거리며, 서툴지만 뜨겁게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열망에 집중했다. 이 일이 나를 고립시키는 벽이 아닌, 세상으로 통하는 하나의 창구이기를 바라면서.



올봄 첫 소설을 준비하며 틈틈이 썼던 글 조각들을 모아 독립출판을 했다. 내가 태어난 사월에,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여름의 절정에는 살면서 처음으로 분가를 했다. 이사한 집을 깨끗하게 단장하고 주말마다 사람들을 초대했다. 여름의 끝자락이 되어서는 5년 전 처음으로 구상했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썼다. 무더운 햇볕이라도 텅 빈 내면을 채워 주는 것 같아 고마웠던 지난 여름과는 분명 달랐다.



그냥 이대로도 좋았다. 나는 충분히 회복되었고, 그토록 절실히 원했던 나의 본질과 평정을 찾았다. 하지만 전해지지 않으면 이야기가   없을 것이다. 푸른 잎을 다가오는 계절의 빛깔로 물들이고 떨어뜨리지 않으면    성장할  없을 것이다. 두렵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약속했다. 꿈속에 잠들어 있던 글을 깨우기로.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세상에 내보내기로.





얼마 전 새집에 초대했던 친구도 이사를 하게 되어 집들이를 갔다. 달달한 디저트를 사서 가는 길.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부는 선선한 바람이 케이크 위의 체리와도 같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전봇대를 둘러싼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한 마리의 길고양이가 버려진 치킨 박스 안의 통통한 닭 다리를 두 앞발로 야무지게 잡고서는 입으로 열심히 뜯고 있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사랑스러운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는 대신 머릿속에 살며시 기록해 두었다.



이유는 많다. 그 이유들은 명료한 하나의 단어로 귀결된다.

이야기. 나, 이야기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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