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6
To. H,
2022.11.16.
H, 나는 오랫동안 나를 너무 찾고 싶었다? 진짜 나라는 게 뭘까. 사람이라는 게 뭘까. 삶이라는 게 뭘까.
어느 날, 너무너무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느 날, 내가 정말 ‘살고 있나’, ‘살아 본 적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느끼기에 사람들이랑 있을 때의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드러내지 않았어. 사람들이 원하는 게 보이니까(보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얼추) 맞춰 주는 게 훨씬 편했거든. 드러내 봤자 별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분명한 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
그런데 혼자 있을 때, 예술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나의 내면의 세계에 침잠해 있을 때만큼은 달랐어. 나는 아주아주 거대한 욕망 덩어리더라. 다채로운 인격과 생각과 감정을 가진. 예술은 내가 언제부턴가 마음을 열 수 없었던 세상과 나를 나누고 깊이 교감하는 방식이었나 봐. 글을 쓴다는 건, 이야기가 쓰고 싶다는 건 그런 의미였어.
오랫동안 너무 외로웠어. 혼자인 느낌이 익숙했고. 더 이상 사람들과 있으면서 손해 보기는 싫었어. 상처받는 것도 지치고. 실망하기도 싫고. 이제 진짜 내가 되어 보자.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어떻게 비춰지고 평가 받든 그냥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걸 해 보자. 그게 뭐든 시시각각 드러내도 보고, 끝까지 쫓아가 보자. 내일 죽을 것처럼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나를 다 내던져 보자. ‘살아 보자.’ 두려웠지만 설렜고, 적어도 혼자 하는 일만큼은 자신 있었어.
그렇게 ‘사월의 꿈’이 최우선인 삶을 살게 됐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 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약하고, 아프고, 무능한 사람이라고 느꼈어. 근데 이 길을 더 가 보니 그것도 온전한 사실은 아니더라. 나의 고통의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아직 나를 많이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어. 내가 나의 가치를 믿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도 믿지 못했나 봐. 그들이 내게 주는 것들, 줄 수 있는 것들. 또 내가 그들에게 더 많이 줄 수 있다는 것도.
이제 나는 나를 알아. 그리고 나를 믿어. 그건 조건부가 아니더라고. 그냥 믿어. 수많은 이유들로도. 단 하나의 이유 없이도. ‘사월의 꿈’을 쓰기 전에도, 나는 나였어. 나는 항상 나였어. 그리고 살아왔어. 살아 있고. 단지 지금은 조금 더 진실에 가닿아 있을 뿐이야.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믿어.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언어가 있고 세계가 있어. 상처와 고통도. 그것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봐 줄래. 어렵겠지만. 실은 우리 모두는 누가 그래 준 경험이 많지가 않은 것 같아. 스스로조차도. 나는 나의 방식으로도 사람들에게 줄 거고,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도 다가갈 거야. 내가 원하는 걸 요구도 할 거야. 그 과정에서 오해와 갈등이 있을 수도 있어. 괜찮아. 그래도 시도할 거야. 그게 이야기의 본질이라고 믿어. 결국엔 쓰는 사람이 나라고 해도, 나는 함께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또, 쓰지만은 않을 거야. 그런 이야기를 함께 살아 낼 거야.
전에는 불투명했던 것들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져. 나를 아프게 했던 그들이 서툴지만 그들의 방식대로 나에게 준 마음과 사랑이. 꼭 내가 원하고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그것 또한 참 소중하다는 걸. 그게 나를 이루기도 하고 나를 살게도 했다는 걸. 아니, 애초에 내가 말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내가 정말 원했던 방식에 대해서 말야. 또 내가 그들에게 주었을 상처도 느꼈어. 내 상처와 한계로 인해 미처 보지 못했던.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를 위로하고야 마는 너. 이 모든 이야기를 고백하도록 만드는 너. 나는 너를 필요로 해. 그리고 너 역시도 나를 필요로 한다고 감히 말할게.
생각하고 쓰다 보니 답장 늦은 편지가 됐다. 긴 얘기 들어 줘서 고마워. 언제나. H, 보고 싶다! 언젠가 너의 이야기도 들려 줘! 알지? 내가 언제든 준비되어 있다는 거.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내가 그랬잖아. 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믿어도 괜찮다는 걸 조금씩 알려 준 사람이었나 봐. 나 계속 이렇게 살아 낼게. 너도 계속 너대로 살아 줘. 너를 믿어.
"당신의 세상은 조금 달라 보여요.
그곳은 어디에 있나요?
어떻게 가요?
갈 수 있다면 가보고 싶어요."
- 김종완, 『흩날리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