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먼 이국으로 떠나기 전, 방학 숙제로 일기를 써 가야 했다. 나는 일기 대신 한 소녀를 지켜 주는 어린 수호천사 데이비드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제출했다.
천상계에서 짓궂은 장난을 치기로 유명한 천사 소년 데이비드는 한 장난 때문에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이에 대한 벌을 받게 되어 지상으로 내려온 데이비드는 우연히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호기심은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는 슬프고 위기에 빠진 소녀를 따라다니며 몰래 돕는다. 장난기 많던 천사 소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숙한 소녀를 닮아간다. 데이비드의 얼굴에서는 소녀가 보이고, 소녀도 점차 천사를 닮아간다. 페이지 중간중간에 그림도 그려 넣었다. 이와 같은 '선한 미행'의 서사는 소설 『사월의 꿈』에서 사월을 감시하는 카라칼을 통해 변주된다. 수호천사 데이비드는 『사월의 꿈』에서 화자이자 사월의 영혼의 형상이기도 한 새, 그리고 무엇보다 『유령에게 바치는 무성영화』의 두 번째 새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그는 내가 쓰는 이야기의 원형인 것일까. 새는 이야기의 본질인 것일까.
당시 어린 나는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푹 빠져 썼음에도, 자라서는 가끔 사람들에게 어릴 적에 이런 이야기를 썼다며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조롱하면서. 언제나 이 이야기가 내 마음의 중심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그런 자신을 매섭게 책망한다. 나의 데이비드에게 정중하게 사과한다. 그는 지금까지 나의 안위와 영혼과 꿈과 예술을 지켜 주었고, 데이비드를 닮아가는 나는 소중한 사람들의, 그리고 가능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안위와 영혼과 꿈을 지켜 주고 싶다. 그들의 삶을 예술로 표현하고 싶다. 어린 나는 그러기에 충분한 경험도 지식도 힘도 없어 절망했지만,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마저 한 번도 그런 소망을 놓아 버린 적이 없었음을 안다. 혼자 이야기를 쓰겠다고 고군분투한 것도 실은 더욱 탁월하게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이야기란 사람과 관계, 대화와 사랑으로 가득하지 않나.
『사월의 꿈』을 통해 애초에 내가 꾼 꿈은 단지 완벽한 명작을 만들어 내어 표면적인 성공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오해 받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일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하며 삶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에 가깝다. 자기 인격의 존엄을 세우고 내 삶의 균형을 찾는 것. 이를 토대로 관계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연결될 수 있음을 믿는 것. 연결의 지속적인 시도 속에서 인간의 진실된 가치를 발현시키는 것. 계획했던 목표를 다 이루기도 전에 나는 내가 진정으로 찾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정말 감사하게도 그것을 충분히 내 것으로 갖게 되었다. 처음 마음속에서 추상적으로 존재했을 꿈은 지속적으로 지켜 나가고 내던질수록 점차 구체적인 삶의 방식과 관계로 드러나고 있다. 약간이라도 슬픔이 깃든 음악을 좋아하던 나는 요즘 햇살 같은 음악을 많이 듣는다. 어렵게 찾은 귀한 평정은 행복이 되더니 눈부신 사랑으로 빛나고 있다. 지금의 나는 너무도 줄 수 있고, 주고 싶다.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극렬하게 싸워 왔던 나 자신과 화해하는 법을 배운 이후로, 화해하는 일이 제법 수월해졌다. 전에 죽음에 관한 책에서 읽었는데, 사람들은 죽기 직전이 되면 절대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이들과 화해를 한다고 한다. '절대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이들'은 주로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는 나는 죽기 직전 말고 일상 속 적당한 순간들에 화해하며 살고 싶다. 적당한 순간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 그런 순간은 오래 충분히 곱씹다 보면 찾아온다. 우선은 내 안에 있는 그들과 화해를 해야 한다. 나의 욕심과 기준을 내려놓고 그들을 더욱 똑바로, 깊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진정 바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준비되었다면, 비가 오고 구름이 걷히고 다시 맑은 하늘이 찾아오듯이 화해의 순간은 자연스레 찾아온다. 며칠 전 소중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다. 연말에 보자고. 무엇보다 온 가족이 모이기로 했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엄마, 아빠, 그리고 그립고 사랑하는 내 여동생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한다.
엄마, 내가 그랬지. 나는 죽어서 가는 천국 말고, 꼭 살아서 천국을 만들 거라고. 나 이제 어떻게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킬지, 예술로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더욱 탁월하게 꿈꿀 자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