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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꽃피 Jan 20. 2024

감(感)

“좋은 기운이 나에게 오고 있어.”





Odilon Redon, Muse on Pegasus, 1907/1910, painting, oil on canvas, 73.5×54.4cm.





"좋은 기운이 나에게 오고 있어." 며칠 전 나는 그렇게 읊조렸다. 달콤한 꽃향기를 맡는 것처럼 숨을 들이쉬고 양손을 부드럽게 움켜쥐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이런 말과 모습을 두고 미신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면의 작용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꽤나 정확한 판단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감(感)'이라 부르고 싶다.


좋은 기운 타령을 했던 그날,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소중한 사람의 삶에 불안한 문제가 생겼다는 전화였다. 그리고 그 문제가 나의 삶 또한 뒤흔들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전화였다. 좋은 기운이 오기는커녕 훨훨 날아가 버린 것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위기를 알리는 이 한 통의 전화로 나는 그 좋은 기운이 손바닥 안에 무사히 안착했음을 느꼈다. 외부의 조건이나 위기 따위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것. 오히려 위기 속에서 실체를 드러내며 휘황하게 만발할.


감. 감이 마침내 나에게 온 것이다.



그것은 첫눈에 반한 인연과도 같으며 한겨울의 따스한 첫눈과도 같다.

그것은 아름답고 건강한 균형이고 평안이다. 즉, 불안 속의 빛이다.

그것은 소소하고 불완전한 일상에서, 행위의 아주 작은 단위에서부터 거대한 의미를 발견하고 고상한 성취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지속적인 행위로써 완벽주의적인 비난과 섣부른 평가를 뒤엎는 힘이며, 시작한 일을 끝내 완주하고야 마는 근력이다. 또한 그것은 중심을 굳게 지키는 삶에 대한 집중이자 도리이며, 수치의 거적을 존엄의 왕관으로 뒤바꾸는 진동이다.


무언가를 잘하고 바르게 하고 기꺼이 쟁취하려 고군분투하기보다는 현재 속에서 그대로 묵묵히 행하며,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나로서 그대로 존재하는 고요한 진실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절실히 갈구했지만 비껴갔던 것,

여동생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든 것,

아버지가 평생을 잊고 산 것,

가여운 그들에게 내가 돌려주고 베풀 수 있는 것.


그것은 영감. 무한한 창조적 우주와 한 개인의 긴밀한 연결을 알리는.

그것은 리듬감. 개인의 안위와 영혼의 호흡을 차분히 따라가는 삶의 템포.

그것은 직감. 앞으로 나의 인생은 꽤나 괜찮을 것이라는 위로.


그것은 내가 어떤 조건 속의 누구여도 괜찮다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좋은 기운 타령을 했던 그날 이후, 나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졌다. 오로지 나의 마음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생각도 의무도,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일도 제쳐 두고 마음에만 집중했다. 살면서 처음이었다. 존경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마음에 집중하는 일을 삶과 존재에 대한 '만능 열쇠'라 불렀다. 나는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최상의 지혜임을, 인간 삶의 에너지의 근원임을 직감했다.


이 시간을 관통한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이전의 내가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위한 도구로 존재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구가 되기를 저항하던 순간에마저, 여전히. 나는 도구가 아니다. 글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작품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성공을 위한 도구도 아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도구가 아니다.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퍼 주는 신의 도구도 아니다.


삶의 중심이 수많은 도구들에서 나의 주체로 바뀌는, 비로소 내가 수많은 도구들을 과감하게 휘어잡는 이 변혁을 환희로 맞이한다.


충만한 감사를 느끼다가 상실에 슬펐다가 과다 분출되는 도파민과 함께 열정이 솟아 올랐다가 납작하게 방전이 되었다가 다시금 살아나는 한 명의 인간. 보편적인 존재이면서도 '감'은 그대로 특별하다. '만능 열쇠'로 나는 그 무엇도 아니면서 무엇이든 가능한 순수 0의 상태에 당도했다. 나는 수만 가지 빛깔을 낯설어 하지 않고 즐거이 담아 낼 수 있는 단단한 그릇이다. 생의 목표를 뛰어넘어 생 그 자체다. 살아 숨 쉬는 공기라 불러도 좋다. 순간순간이 좋다. 나여서. 아담을 향해 신이 기쁨으로 내뱉은 찬사처럼. 좋다.


나는 그저 '감'을 가진 사람일 뿐. 지금, 여기에 그렇게 존재할 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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