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꽃피 Jan 21. 2024

진눈깨비 내리는 밤

A Wet Night





William A. Fraser, A Wet Night, Columbus Circle, ca.1897-1898, Gelatin silver print, 419.1 × 508 in





9시가 넘어 밤 산책을 했다. 산책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바람은 차고 칙칙한 하늘 아래 거리는 축축했다.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쯤 진눈깨비가 내렸다. 마치 가로등이 눈을 뿌리는 것 같았다. 


걸으면서 어제처럼 나의 마음에 집중했다. 마음에 집중하니 정신은 맑아지고 주변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배경 속에 흐릿하게 넘실대던 나의 윤곽이 또렷해지며 실체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런 느낌을 가지고 주변의 사물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걸었다. 한 교회 앞의 나무에 달린 아직 수거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전구를 보았다. 오래된 주택의 창문에 붙어 있는 아름다운 장식도 보았다. 오르막길의 정점에서는 교회의 뾰족탑 위에 솟아난 하얀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쭉 나열하니 성스러운 장소와 상징에 이끌린 듯하다. 전부 부드럽지만 강력하게 치유된 마음의 표상들이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모피를 입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자를 보았다. 나는 최대한 그림자처럼 조용히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었기에 갈색 모자를 쓰고 길가의 누구라도 입을 법한 검은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나는 외국인 같기도 한 그 여자와 내가 한 단편 독립 영화에 출연하는 상상을 했다. 현재의 대조적인 컬러와 모양새가 캐릭터 대비를 보여 주기에 딱일듯 싶었다. 대조적인 두 인물이 밤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말을 트고 친구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외국인일지도 모를 이 여자가 나의 갈색 모자를 쓰고 나는 파격적으로 보라색 머리를 하고선 처음 만났던 이 횡단보도 앞에서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밤하늘처럼 밋밋한 망상을 끝내고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공원으로 갔다. 축축한 밤이었기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공원의 경사진 언덕을 오르며 나의 고집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더 정확히는, 내 고집스러움을 내려놓을 것인지 더욱 집요하게 추구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직은, 젊은 기력이 남아 있는 한 내려놓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공원을 내려오는 길에서는 양손에 꽉 찬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가는 두 모자를 보았다. 곧이어 지인을 마주친 아주머니는 "어, 우리 큰아들!"이라며 자랑스럽게 옆의 키가 훤칠한 아들을 가리켰다. 지인을 보내고 아주머니는 길을 걷다가 미끄러지셨다. 그 미끄러짐이 너무도 매끈해서 나는 걱정의 시선을 내던지는 동시에 큰아들의 외침을 립싱크했다. "뭐야?"


혼자 외출을 하면 종종 느끼듯 내 눈이 카메라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분명 눈으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한편 머릿속에서는 글을 쓰고 있었다. 글 쓰듯 생각하다니! 그저 마음에 온전히 집중하기로 해놓고선, 여전히 글에 미쳐 있구나. 어쩌면 나는 내 이상의 그 이상일지도 몰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기준이 높아서 그렇지 글에 대한 자세만큼은 이미 어떤 지점에 올라 있을지 몰라. 글 쓰는 괴물일지도 몰라. 정말이지 괴물이었으면 싶었다. (방금 이 대사도 몇 시간 전 다시 마주한 횡단보도 앞에서 생각한 문장이다.) 무언가가 되지 않기로 해놓고선.  


집으로 돌아가며 다시 오른 언덕길에서는 마음의 성스러운 표상들을 다시 한 번 관망하며 사진을 찍었다.





흰 십자가, 창문 장식, 크리스마스 전구를 단 나무.







매거진의 이전글 감(感)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