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로 그리는 그림, 아이의 공감각

by 라파고

62개월 22일

와이프가 색종이를 하나 거실로 나오더니 이게 무엇인지 맞혀보라고 했습니다.

아들내미가 그린 그림이라면서요.



음.. 사람이야? 아니.

음.. 동물이야? 아니.

음.. 사물이야? 음.. 아니.


응? 다 아니라고? 응 다 틀렸어.

그럼, 캐릭터야? 만화 캐릭터? 아니.

정말 모르겠어 알려줘. 응, 전자 기타래.


음.. 정답을 듣고 다시 보니 이해가 가기도 하는 작품입니다. 좌측 하단에서 밀집되어 있는 선은 특정 음역 구간대에서 아주 빠르고 집중적인 애드리브 떠올린 듯합니다. 이 구간에서는 보통 음표와 멜로디, 선율, 템포 등이 격정적으로 어우러져 있는데, 그걸 표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열정적인 애드리브 다음에는 손가락이 기타 줄을 퉁기는 것이 아니라, 템포를 낮추어 기타 줄을 타고 이동하여 선율의 아름다움을 주는 구간을 표현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측으로 갈수록 음역대와 템포를 동시에 낮추면서 서정적인 끝맺음을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색종이 한 장에 그린 일렉기타 악보 한 곡에도 기승전결이 기가 막히게 느껴집니다.


가운데 우뚝 솟은 형태를 보고 배추도사나 호랑이 발톱 정도로 생각했던 저희 부끄러운 창의력에 대해 반성합니다. ( 6살 아이가 배추도사를 알리도 없지만..)



그다음 문제야. 이건 뭐게?

응? 이건 또 뭐야...

비.. 머리카락..은 아니겠지..

어 당연히 아니지

...

...

정답! 드럼

딩동댕. 제법이네


음.. 드럼은 둔탁한 소리와 경쾌한 소리 가볍고 탁한 소리 등이 있는데, 선의 길이와 굵기가 다양하지 않긴 한데.. 그래도 타격감, 박자감은 잘 표현했네.. 라고 첨언을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과연 현재 39살인 내가 6살 아이의 창의성을 평가할 위치에 있는지부터 우선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드럼에 관한 그림을 구상하다면 소리가 아니라 그 형태를 먼저 떠올렸을 것입니다.. 스케치북에 동그라미들을 열개 정도 그리고, 스틱이라면서 젓가락 한 벌을 그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몹쓸 상상력이지요. "그림=형태"라는 형식을 깨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 아들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늘은 하늘색, 나무는 초록색, 여자는 핑크색 머리 길고, 남자는 파란색. 이렇게 통념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그림 그리는데 한 번도 잘 못 그렸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 문제가 아니라서, 그림은 그냥 그림이지 잘못 그린 그림이 있을 리 없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아들은 소리, 박자, 맛, 기분, 욕구, 촉감 등을 그림으로 표현해내곤 합니다. 모서리를 깎아주고 덧칠해주고, 지워주지 않아서 날 것 그대로 그립니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 범인(凡人)인 저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이의 색종이 그림 한 장에 너무 많은 비평과 감상을 하였습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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