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취미를 물어오면 나는 습관적으로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답하곤 했다. 주변의 아빠들이 자동차나 자전거, 골프, 혹은 정교한 피규어 수집 같은 저마다의 '로망'에 에너지를 쏟을 때도, 나에게는 그런 거창한 추구미가 없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녹록지 않았던 환경이 내 몸에 '무욕(無欲)의 삶'을 체화시켰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열렬히 갈망하는 것이 결국 상처로 돌아온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던 아이는, 욕망하기보다 절제하는 삶에 익숙한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유일하게 곁을 내준 존재가 있다. 바로 술이다. 20대 시절의 술은 대인관계를 위한 매개체였다. 사람과 술은 마치 한 세트의 '페어링' 같아서, 술이 생각나면 사람을 찾았고 모임에는 언제나 술이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불혹을 넘기고 육아라는 썰물과 밀물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들어오니 그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들과 육아휴직 중인 나의 시간은 좀처럼 교집합이 없었다. 그들이 사무실에서 치열한 일과를 보낼 때 나는 아내의 출근과 아이의 등교 이후 잠시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그들이 힘든 일상을 마치고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시간에는 나는 집에서 아이의 저녁을 챙기고, 숙제와 목욕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아이가 침대에 누우면 밤 10시가 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신저를 열어보지만 "거의 끝나가니 다음에 보자"라는 익숙한 답장이 돌아올 뿐이다.
그래서 나는 육퇴(육아퇴근) 후 혼자서, 혹은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때로는 혼자서 책이나 OTT를 보면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술이 필요했다. 헤비한 안주 없이도 부담 없는 술. 그렇게 만난 것이 바로 '위스키'였다. 예전의 나에게 위스키는 그저 '양주'라는 이름의 독하고 비싼 술, 특별한 날 구색을 맞추기 위해 큰마음 먹고 사는 어려운 술이었다.
하지만 위스키에 입문하고 나니, 그 편견은 완전히 깨졌다. 위스키는 일단 맥주나 소주에 비해 향이 풍부하고 맛이 다채로웠다. 가장 좋은 점은 마시는 방식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안주 없이 마셔도 그 향만으로 충분하고, 과일이나 초콜릿 같은 가벼운 안주와도 잘 어울렸다. '니트(스트레이트)'로 마시며 위스키 본연의 맛을 즐길 수도 있지만, 미온수나 얼음을 타서 마시면 부드러움을 더하고, 탄산수나 토닉워터를 섞어 '하이볼'로 만들면 청량한 기분을 낼 수도 있다.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달콤한 과일 향이 나는 것도 있고, 불 피운 장작 같은 스모키한 향이 강렬한 '피트' 위스키도 있다. 남성적인 강한 맛을 자랑하는 것도, 풀잎처럼 은은한 향을 품은 것도 있다. 재미있는 건(어쩌면 당연한), 비싼 위스키일수록 목넘김이 부드럽다는 사실이다. 그 부드러움과 깊은 향은 마치 육아라는 고된 시간을 견디고 찾아온 작은 보상 같다.
물론 육아휴직 기간에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는 않아서, 18년, 21년 숙성 같은 비싼 위스키는 그림의 떡이다. 하지만 괜찮다. 종류별로 가성비가 좋은 '엔트리급 위스키'들을 한두 병 술장에 채워놓고, 매일 밤 나만의 시간에 가볍게 한 잔씩 즐긴다. 버번 중에서는 우드포드 리저브, 피트 중에서는 탈리스커를 특히 좋아한다. 가끔은 잭 다니엘 블랙으로 거칠고 쿨한 기분을 내기도 한다.
아빠 육아휴직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결코 천하태평한 휴식이 아니며, 끝없이 반복되는 집안일과 아이 뒤를 쫓는 분주한 일과 속에서 문득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견뎌내는 현장이다. 그런 고단한 시간들을 견디게 해준 건, 글렌캐런 잔에 조심스레 채워 넣는 위스키 한 잔이다. 왁자지껄한 모임이나 화려한 안주가 없어도 느낄 수 있는 풍부한 향과 맛은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이 해주는 위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