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일주일 전 이야기
루틴은 순식간에 붕괴될 수 있다. 하지만. : 개강 일주일 전 이야기
코로나 시대를 맞은 많은 미국 학교가 가을 학기 전체를 온라인 수업으로 바꿨다는 뉴스가 한국의 많은 매체에 보도 됐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수업 형태를 면대면 수업이 없는 수업으로 바꾸었다는 의미인데, 면대면이 아닌 수업은 온라인 수업(fully online)과 실시간 원격 수업(remoted scheduled)으로 나뉜다. 온라인 수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 는 것처럼 강의 동영상, 보조 동영상, 읽기 자료, 토론 게시판과 댓글 참여 등 실시간 활동이 없는 수업을 말한다. 실시 간 원격 수업은 매주 지정된 시간에 실시간으로 강사와 학생들이 만나 수업을 진행하고 참여하는 형태다. 나의 강의 시 간은 월, 화, 수, 목 - 한 주에 4회 아침 9시 30분부터 11시까지다. 이 강의는 나의 미국에서의 첫 단독 강의이면서, 모두 에게도 처음인 ‘도전! 한 학기 전체 실시간 원격 수업!’이 되겠다.
지난 8월 10일부터 13일까지, 폭풍 같은 오리엔테이션과 티칭 트레이닝이 끝났다. 내일 예정된 학과 일정만 마치면 각오한 것보다 훨씬 바쁘고 강도 높았던 새 학교 첫 일정이 끝난다. 일주일 동안 훈련받고 고작 며칠 준비한 것으로 한 학기를 어떻게 가르칠지 상상이 안 되었는데,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딱 첫 수업 직전까지 준비할 수 있는 분량을 일주일 동안 트레이닝 받으며 준비했다.
월요일에는 선배들의 전폭적인 도움과 지원이 감사했다. 화요일부터는 조금씩 감이 온다. 그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해 준 이유는 본인들도 방대한 일과 새로 배워야 하는 것들에 압도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이 학과의 특징 같은데, 대 학원생들끼리 서로 챙겨주는 분위기가 유독 강하긴 하다). 그래도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자정 전에 자고 새벽 6시~6시 30분에 일어났고, 하루에 30~40분씩 운동을 했고, 세 끼를 챙겨 먹었는데, 수요일쯤 되니 깔끔했던 카펫 위에 전날 벗 어놓은 양말과 한국에서 받은 택배 포장 뽁뽁이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밥을 해 먹거나 설거지할 마음의 여유도 없어 졌다. 아침에는 오트밀, 점심에는 구운 고구마와 토마토, 저녁에는 냉장고에 남아있던 흰쌀밥 반 그릇과 이틀 전에 끓여 먹다 남겨둔 맛 없는 ‘콩나물 애호박 버섯 된장국’을 간단히 먹고 그릇들은 모두 식기세척기로 넣어버렸다(확신하건대 7월에 이 국을 먹었으면 정말 맛있었을 것 같다. 여름엔 입맛이 없으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코로난가?” 묻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궁금함조차 생기지 않는다).
작업을 좀 더 하느라 수요일 밤에 조금 늦게 잤지만, 목요일 아침에는 평소 일어나던 대로 일어났다. 알람을 끄고 좀 더 자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10분 전에 들어온 학생 메일을 열어보았기 때문이다. 메일을 봤다고 바로 답변을 해 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쌓아놓고 싶지 않아서 깬 김에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은 아침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점심도 코코넛워터랑 마지막 하나 남은 구운 고구마를 먹었던 것 같고, 지금 시각이 밤 9시인데 아직 저녁 식사 준비와 운동은 시작도 안 했다. 균형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실천해 온 루틴은 단 며칠의 공격으로 한순간에 휘청이려 한다.
오늘 트레이닝 중 신구 강사들이 만나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대학원생으로서의 본분과 강사의 책임의 균형을 어떻 게 맞추냐는 질문에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본인도 첫 학기에 말도 안 되는 휘청임을 겪었다고, 본인을 제일 우선에 놓 아야 한다고 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운동해야 한다고. 그다음 중요한 것은 학과 공부다. 물론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학원 과정에 들어온 이유는 내가 연구를 하고 최종적으로 학위를 얻기 위함이고, 강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강의 일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평균 학점이다. 강의를 잘해도 학점이 떨어지면 더 가르칠 수 없다. 상식적인 조언 으로 들릴 수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진심으로 뼈아픈 시간이 녹아있는 조언으로 들렸다.
생각하던 것을 글로 적은 김에 당장 부엌으로 가서 (아까 먹은 줄 알았지만 손대지 않은 것으로 확인한) 마지막 고구 마와 두유 반 컵을 들고 다시 노트북이 있는 베란다로 나왔다. 부엌에는 역시 아까 생각나지 않았던 아침 식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재빨리 구워 반쪽만 먹고 남겨놓은 식빵, 반만 마시고 남겨서 컵에 담긴 윗부분이 조금 말라 뭉쳐진 두유, 계란 2개로 만든 스크램블 위에 베이컨 칩을 올려 먹은 노랗고 불그스름한 자잘함이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침대방의 세면대 탁자에는 한 번 쓴 수건과 어제 입은 하얀 남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고작 며칠 사이 머릿속 기억 대신 집 곳곳에 개인적 사료들이 쌓였다.
다시 수업 준비 얘기로 돌아가겠다. 신임 강사들은 트레이닝을 담당한 교수님에게 언제든 질문할 수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교수님과 새 강사들이 온라인 회의 방에 모여 어려운 점들을 얘기하고, 수업에 쓸 아이디어를 나눌 시간을 갖기로 했다. 개강과 동시에 강사가 스스로 강의를 준비하고 정해진 시간에 실시간으로 화상 강의를 진행한다. 지원 시스템이 있지만, 사실상 수업만 하는 게 아니라 수업 준비(강의 자료 만들기와 온라인 강의실 꾸리기)와 수업 후 처리(학생들 면담과 성적 매기기)를 타인의 도움 없이 하므로 상당한 업무량이 요구된다. 휴, 이제 막 시작했는데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고 스스로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
이 바쁜 와중에 이 글을 쓰는 것도 오직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글을 쓰다가 나를 먹이고, 휘청이던 마음이 한쪽으로 넘어지지 않게 받쳐주고, 안경을 닦아 새로 쓰듯 눈꺼풀을 깜빡여 눈빛을 날카롭게 맞춰본다. 휴식을 취하고 먹이고 움직이는 시간을 정하고, 내 수업과 공부 시간을 배치하고, 그 후에 절망적으로 조금밖에 남지 않은 시간 을 쪼개 강의 준비와 정규 수업과 수업 후 처리를 할 것이다. 나에게 배울 학생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준 비하고 잘 가르치고 싶었는데 나의 우선순위는 살아남기가 되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겠다. 루틴은 언제든 휘청일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는 데 필요했던 100일 동안 루틴을 최대한 살려내고 중요한 순서대로 에너지를 모아 살아남아 보이겠다.
이 글은 온라인 매거진 2W 3호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