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
H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어그도 운동화도 아닌 새하얀 털부츠를 신고 있었다. 수업 중 발표를 할 때에면 팔토시를 낀 가느다란 팔을 휘저으며 속삭이듯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가 글을 잘 읽었다고 말하며 연락처라도 나누자고 했을 때,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마치 가장 화려한 공주님의 간택을 받은 시녀처럼 그러자고 말했다.
우리는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고,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일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족사와 유산 경력, 그에 따른 슬픔이 모두 이야기가 아닌 진짜라고 이미 얘기했으니까. 경복궁 옆의 갈대 들판을 몇 번이고 돌면서 그녀가 본 전시, 읽은 책, 회사에서의 어려움을 들으며 나는 이것이 의미있는 우정의 시작임을 확신했다. 내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저는 더 이상은 미국 중년 백인 남성 취향의 글을 읽어주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더 들더라고요. 그 정서가 좀 지겨워서...
그래도 필립 로스는 엄청 잘 쓰잖아요.
내 생각 없는 항변은 먹히지 않았다. H는 넷플릭스의 <도시인처럼pretend it’s a city>와 시그리드 누네즈를 추천해주고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나는 몇 번이고 갈대밭에서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어쩌면 필립 로스는 그저 상징일 뿐이고, 그녀는 무언가 나에게 사랑하기 어려운 점을 발견한 것이 틀림 없다고. 그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지다가, 또 한 번 방향을 틀어 다른 형태가 되었다. 그녀는 분명 나에게 무언가 빛나는 것, 무언가 나의 글을 초월한 반짝임을 발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해주기를 기대했음이 틀림 없다. 그러니까 그녀는 필립 로스 따위를 읽는 사람은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 마땅히 발견해냈어야 하는 매력을 찾아낼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다른 글쓰기 수업을 듣는 동안에도 비슷한 일은 일어났다. 그 테마는 계속 반복되었다.
글쓰기 수업으로 만난 사람은 다른 곳에서 만난 사람과는 달랐다. 한 바탕 마음 속을 헤집어내 보여주고 천역덕스럽게 딴청을 피우는 일. 극도로 공들여 깎아낸 내면의 노출이 마치 전혀 없었던 일인 것처럼. 글 속에서 어떤 고통도 지질함도 슬픔도 모두 드러냈으면서도 그 감정이 마치 지금 자신을 흔들어 놓는 것은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증명하는 일. 그리고 우연찮게 읽어내버린 타인의 내면을 예의바르게 모르는 척 하는 일까지. 소설을 배우며 다녔던 글쓰기 교실의 뒷풀이 자리에서는 아무도 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몇 살이세요, 전공이 뭐예요, 결혼은 하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누군가 판을 깔기 전까지는 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가면 놀이까지가 모두 글쓰기의 과정이었다. 화자와 자아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일.
필립 로스의 상처 이래로 나는 글쓰기 수업에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글로 내면을 알아본 사람은 아주 작은 지표 하나로도 화들짝 노출된 부위를 숨기고 사라질 수 있으니까. 이 사람은 어떻게, 얼마나 읽히고 싶어하는 걸까. 내가 그렇게 읽어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건 조금 에너지가 드는 과정이었지만 모든 관계는 다 에너지가 드니까. 말이 통하는 건 원래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까.
친한 친구 중에 시인과 결혼한 편집자가 있다. 영원히 훔쳐보고 싶은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났다는 점에서 언제나 내 부러움을 사는 친구다.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다 수업 뒷풀이에 갔던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가 단호하게 말했다.
뒷풀이 하는 수업 가지마. 선생이 또라이야.
왜? 라고 묻기 전에 매번 뒷풀이에서 문학관을 설파하던 중년 남성의 얼굴과 은근히 여자친구를 구하는 티를 내던 소설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맞지. 근데 그럼 김 시인님이랑은 뒷풀이를 안 했었어?
친구의 남편은 안했단다. 그 분은 연단에 서는 노출증을 도에 넘치게 추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잠깐의 대화, 커피를 마시는 탐색전, 쉬는 시간의 공방도 없었다면 대체 친구랑 결혼은 어떻게 했을까. 은폐와 발각의 줄다리기 아니면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을까. 지저분한 꼴을 무릅써야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