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로 집을 지을 순 없지만

by 유영원



지금 살고 있는 집에 계속 살 수 있을지 3월에 결정이 난다. 서울 한복판에서 15만원 남짓한 관리비만 내고 살던 이 행운이 계속될 수 있을지 기로에 섰다.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놨다. 전출 가서 빌라를 살까봐. 왜? 빚은 잘 갚는데 돈을 못 모아. 서울에 이 돈 주고 살면서도 못 모았잖아. 이사라도 가면 진짜 못 모을 것 같아.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있는 친구가 말했다. 그런 이유로 집을 사면 안돼. 투자 관점에서 생각해야지. 입맛이 써서 아메리카노를 쪽 빨았더니 더 썼다.


2월에도 돈 쓸 일이 한가득이다. 친구의 조언을 듣고 예상 가계부를 적어봤더니 더 그렇다. 전자책 리더기를 새로 사야할 것 같다. 책 불러오기도 안 되고 와이파이도 버벅거리며 잡는다. 소니의 PRS T1, 크레마 카르타, 리디 페이퍼, 크레마 그랑데, 이번에 고장난 크레마 카르타 G까지 많이도 써봤는데 하나 같이 다 내구성이 약했다. 최신 기기는 다를까? 또 20만원을 주고 사야하나? 하지만 있는 전자책을 눈 아프게 핸드폰 불빛으로 읽을 순 없을 거 같다. 안 그래도 작년에 회계팀에 오면서 시력이 많이 떨어졌으니까.


다람이 사료도 새로 사야한다. 대용량으로 사면 10,000원 정도 싸지만 뜯는 순간 산화가 시작되어 고양이 건강에 좋지 않단다. 내 돈으로 쓰는 게 얼만데 만 원 아끼자고 다람이 사료를 싸게 사기엔 양심에 찔린다. 멋 모르고 산 저렴이 사료가 좀 남았지만 그래도 로열캐닌으로 살 예정이다. 고양이 이빨에 치석이 덜 쌓이게 해준다는 덴탈 워터도 또 사야 한다. 이빨 닦기를 싫어하고 물도 잘 안 마시는데 캣닢 성분이 들어서인지 덴탈 워터를 타준 물은 더 찹찹 잘 마신다.


그거 외에도 돈 쓸 일이 한가득이다. 다 써가는 코랄 베이지 립밤, 상자만 남은 브리타 필터가 눈에 띈다. 단추가 세 개 떨어진 롱패딩은 숨이 다 꺼졌다. 하나하나 다 뜯어보면 필요한 것들인데 다 합치면 벌써 몇 십 만원이다. 안 보이는 소비도 그렇다. 유튜브 프리미엄은 음악 들어야 하니 포기할 수 없고 배민 클럽도 크레마 북클럽도 엄마가 좋아하는 넷플릭스도 모두 연장해야 한다. 하나 같이 날 행복하게 해주지만 환금성은 좋지 않은 소비들이다. 내가 돈 쓰는 곳이 대체로 그렇다.


연말에는 회사에서 큰 일이 있었다. 31일, 일년 중 가장 돈 나갈 곳이 많은 날에 갑자기 자금이 똑 떨어졌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비밀이었다가 들린 소식에 바닥이 흔들리는 충격이 몸을 덮쳤다. 거래처에서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팀 동료는 야근을 하다 말고 개인 카드를 긁어주고 복귀했다. 자금이 들어올 때까지 하루종일 기다리다가 일단 퇴근하라는 지시에 밤 9시를 넘겨 집에 갔다. 차를 태워준 선배가 운전을 하다가 문득 말했다. 더럽게 찝찝하네. 본가의 가족들에게 새해 인사할 경황도 없었다. 그 날 이후로 회사에서 큰 돈이 나갈 일이 생기면 심장이 쿵쿵 거리는 증상도 생겼다.


투자 관점에서 돈을 생각하기는 나랑은 너무나 먼 일인 것만 같다. 오히려 내게 돈이란 평온과 맞바꿀 수 있는 무언가다. 행운의 돌처럼 쥐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뭐 그런 용도. 불리고 아끼고 어디에 채워넣고 돌려넣고 그런 것보다도. 나를 제외한 팀 동료들은 나보다 이 일을 오래했고, 돈이란 흐름의 일종이라는 생각에 훨씬 익숙하다. 그럴 줄 알았어. 캐쉬 플로우가 막힌 거지. 그런 식으로 연말에 있었던 일을 설명한다. 새로 계약한 건이 더 있으니 올해는 더 나을 거라고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에겐 위로가 되지 않는다. 계약금이 들어와도 회사에선 신사업에 더 투자할 생각일 거다. 위태롭기 짝이 없다. 또 써버린다고? 물론 더 벌 수도 있지, 근데 그냥 쥐고 있으면 안돼? 나에게 돈이란 은행에 모셔두는 예쁜 조약돌 같고, 그 조약돌을 몇 배로 불리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조약돌은 모으는 데 의미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 조약돌을 벽돌 삼아 집을 지을 수는 없다. 몇 백억의 매출도 못 이겨내는 충격이 세상엔 있다. 나의 작고 귀여운 월급으로 바닥이 꺼지는 충격을 또 막아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집을 사지 말라고 충고했던 친구는 잠실 아파트에 산다. 20대 때부터 나는 그애가 좁은 원룸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살던 왕십리 투룸으로, 노원의 구축으로, 서대문구의 신축으로, 남편이 된 남자친구와 잠실새내의 대장 아파트로 옮겨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 보았다. 너 성공했구나. 집들이 하던 날 내가 오히려 감격에 겨워 말했으면서도 그게 내 이야기 같진 않다. 내가 맺고 있는 자본주의와의 어정쩡한 거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이 체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쁜 립밤과 덴탈 워터를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그렇다. 그러니까 그다지 적응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건 윤리적 선언도 아니고 용기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 친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잘 맞지 않게 태어난 인간의 자의식 그 뿐이고, 그다지 보기 드문 태도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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